나의 편파적인 한국현대사 – 나의 대통령 ⑧박근혜
1. 박정희의 딸, 그 이름의 무게로 정치를 하다
그녀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던 밤, 나는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건 단순한 정치적 패배감이 아니었다. 그 순간은 민주주의의 퇴보를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고통이었다.
박근혜라는 이름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었다.
그건 ‘유신’이라는 시대의 그림자였고, ‘박정희’라는 권위주의 정권의 유산이었다.
그녀가 내세운 ‘경제민주화’, ‘복지국가’ 같은 공약은 마치 누군가가 써준 원고를 반복 낭독하는 수준이었고,
그 말에 어떤 철학이나 방향성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보수층은 그녀를 ‘추억’했고, ‘정권 경험자’, ‘믿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박정희의 딸’로 기억했다.
그 정서는 강력했고, 심지어 민주주의보다 더 단단했다.
그리움은 판단을 무디게 만들고, 기억은 왜곡되기 쉬운 법이다. 박근혜는 정치적 경력도, 행정 경험도, 사상적 토대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후에 새누리당)의 간판이 되었고,
비상대책위원장 시절엔 당내 갈등을 억누르는 존재로 군림했다. '침묵의 리더십'이라 포장된 그 모습은, 사실상 불통의 전조였고, 정치적 논쟁을 피해가는 기묘한 회피술이었다.
대선 후보가 된 그녀는 토론에서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즉흥적 대응조차 불가능한 원고 의존형 후보였다.
그러나 국민 다수는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박정희처럼 말보다는 실행이 중요하다"는 프레임이 작동했고, ‘경제 대통령’,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을 유일한 인물’이라는 환상이 덧씌워졌다.
2012년 12월 19일, 박근혜는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날은 여성 리더십의 승리가 아니라, 유신의 유령이 다시 청와대로 입성한 날로 기억되어야 한다.
그녀는 스스로를 ‘박정희의 딸’이라는 정체성으로 무장했고, 실제로 그 정체성 외엔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그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제 막 태어난 민주주의의 아이가 다시 구속복을 입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 불안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는 대한민국을 ‘국가’가 아닌 ‘궁정’으로 되돌렸고, 국민을 ‘시민’이 아닌 ‘신민’으로 대했다.
득표율도 51.6%였다
2. 불통의 리더십과 권위주의의 부활 – 국민 없는 국정운영의 시작
박근혜 정권의 출발은 예고된 재난이었다.
그녀는 후보 시절부터 기자들의 질문을 정면으로 받아본 적이 없었다.
기획된 기자회견, 각본 있는 발언만 반복되었고, 심지어 기자들의 질의응답을 거부하거나,
사전에 ‘질문지’를 제출하도록 요구하는 장면도 포착됐다.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청와대는 박근혜 1인의 성역처럼 운영되었고,
각 부처 장관은 대통령의 눈치를 보며 “심기 경호”에 몰두했다.
매주 열리는 수석비서관회의는 ‘지시사항 전달식’에 불과했고, 국정은 수직 구조의 하달 방식으로만 작동했다.
실제로 박근혜는 수석들에게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따지지 말라”는 식의 발언을 반복했다.
박근혜의 화법은 철저히 단문과 명령문 중심이었다.
“그건 안 돼요.”
“제가 말했잖아요.”
“이거 왜 이렇게 됐는지 알아보세요.”
정책적 토론이나 논쟁은 없었고, 정책 결정의 배경이나 맥락이 설명된 적도 거의 없었다.
이런 스타일은 단순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권위주의적 DNA에서 기인한 구조적 문제였다.
2014년 말, 박근혜 정권을 뒤흔든 첫 번째 내홍이 터졌다.
바로 ‘정윤회 문건’ 파동이었다. 청와대 내부 문건이 외부로 유출되었고, 그 안에는 정윤회(박근혜의 비선 실세로 알려진 인물)가 청와대 인사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문건 유출이 아니었다.
청와대 내부에서조차 ‘누가 국정을 운영하고 있는가’에 대한 회의가 번졌고, 이를 폭로한 박관천 경정은 “청와대에는 권력 서열 1위가 최순실, 2위가 정윤회, 대통령은 3위다”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은 이 문제를 제기한 내부 인사들을 축출하고, 문건을 보도한 언론을 향해 ‘찌라시 언론’, ‘허위 보도’라고 비난하며 되레 언론탄압에 나섰다.
또 하나의 핵심은, 당시 청와대 핵심 인사들이 ‘십상시’라 불릴 정도로 비선 권력의 농단에 휘둘렸다는 점이다.
십상시란 김기춘, 이재만, 안봉근, 정호성 등 대통령 측근 비서진을 일컫는 말로, 명백히 황제 정치를 가능케 한 내각과 당의 ‘거수기 체제’를 상징하는 단어였다.
이들은 국정 전반에 개입하며, 장관 인사, 언론 대응, 정책 방향까지 조율했다.
정작 박근혜는 이들이 어떤 지시를 내리는지도 파악하지 못한 듯한 태도를 보였고, 그것이 무능의 증거인지, 고의적 방치였는지조차 구분이 어려웠다. 대통령의 메시지는 기이할 정도로 단절되어 있었고, 국민이 대통령에게 바라는 가장 기본적인 리더십, 즉 소통, 설명, 책임 중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박근혜는 민주공화국의 수반이라기보다, 청와대라는 폐쇄된 궁의 여왕처럼 행동했다.
이러한 불통과 권위주의의 결정적 폐해는 뒤이어 발생하는 여러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세월호 참사, 역사교과서 국정화, 사드 배치, 그리고 최순실 게이트.
그 모든 사건의 공통분모는 박근혜 정권의 국정 운영 방식이 얼마나 폐쇄적이고 일방적이었는가에 대한 증거였다.
결국 우리는 한 가지를 분명히 목격했다.
권위주의는 망각되면 반복된다.
그리고 박근혜 정권은, 그 반복을 ‘시스템’이 아닌 ‘사람’으로서 체현한 대표 사례였다.
3. 국정원 댓글 사건과 윤석열의 첫 등장 – 공작정치의 민낯
박근혜는 대선에서 이겼지만, 그 승리는 처음부터 국민이 주인인 민주주의의 원칙을 훼손한 결과였다.
2012년 12월 대선.
선거가 끝난 지 불과 며칠 만에 이상한 낌새가 돌았다.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서 활동하는 수상한 ID들, “문재인은 종북”, “박근혜는 유일한 선택”이라 반복하는 댓글이
게시판마다 도배되었다. 그 실체는 충격적이었다.
국가정보원 심리전단 소속 직원들이 조직적으로 온라인 여론조작을 벌인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른바 ‘국정원 댓글 사건’.
그들은 수백 개의 아이디를 동원해 문재인 후보를 비방하고 박근혜 후보를 찬양하는 여론을 조작했다.
민주주의의 심장인 선거를, 권력기관이 ‘도청과 조작’의 방식으로 유린한 것이다.
이 사건은 단순한 공무원의 일탈이 아니었다. 조직적으로 계획된 정치공작이었고, 그 지휘 라인은 국정원 원장 원세훈으로 이어졌으며, 그 배후에는 정권 재창출이라는 명분이 있었다.
검찰은 이 사건을 수사하려 했지만, 당시 청와대와 법무부는 노골적으로 수사에 외압을 행사했다.
이 때, 한 검사가 등장했다.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 소속 윤석열. 그는 국정원 관계자에 대한 체포영장을 집행했고, 댓글 수사팀을 이끌며 진실을 파헤치려 했다. 하지만 윤석열은 곧 수사 외압에 정면으로 반발했고, 내부 고발자로 낙인 찍혀 좌천되었다.
2013년 국정감사장에서 그는 당당하게 말했다.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윤석열은 훗날 박근혜 탄핵 수사의 중심에 서게 되고, 그보다 더 아이러니한 건,
그가 나중에 박근혜를 계승한 정치세력의 대선 후보가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는, 윤석열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검사 중 한 사람이었다.
국정원 댓글 사건은 이후 국군사이버사령부, 보훈처, 심지어 경찰까지 여러 국가기관이 선거에 개입한 정황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국가기관 대선 개입 총체전’이었다.
박근혜는 이런 국가기관의 ‘은밀한 충성’을 바탕으로 당선되었고, 그렇기에 출발부터 민주적 정당성을 갖추지 못한 대통령이었다.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가장 심각하게 훼손된 순간”중 하나로 기록된다.
국정원이 여론조작을 통해 선거에 개입하고, 이를 수사한 검사들이 좌천되며, 정권은 모든 비판을 덮고 무력으로 진실을 막으려 했다. 2017년 대법원은 원세훈에게 “선거에 영향을 줄 목적이 인정된다”며 실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박근혜 본인은 그 어떤 정치적 책임도 지지 않았다.
국정원 댓글 사건은 단지 과거의 일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선거라는 제도를 신성하게 지킬 때 비로소 유지될 수 있는 것이고, 그 제도가 조작당했을 때 우리는
‘정권’이 아니라 ‘체제’가 무너졌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박근혜 정권은 그 무너짐의 시발점이었다.
4. 세월호 참사 – 대한민국 전체가 장례식장이 된 날
2014년 4월 16일 아침,
하늘은 잔잔했고, 파도는 조용했다.
하지만 그날 바다에서는, 대한민국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전국의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켜고 믿었다.
“전원 구조”
속보 자막 하나가 나라 전체를 안도하게 했고, 곧 이어진 정적과 혼란은 그 안도가 얼마나 잔인한 거짓이었는지를 폭로했다.
나는 안산에 살고 있었다.
단원고 학생들이 집단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다는 걸 몰랐던 이웃조차, 그날 오후엔 집집마다 조용히 TV를 켜놓은 채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소방차가, 구급차가, 경찰차가 지나가는 소리도 이제는 익숙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전원 구조가 아니라 전원 실종입니다.”
그 문장 하나가 마을 전체를 뒤흔들었다.
세월호가 가라앉는 그 순간, 우리 동네는 숨을 죽였다.
친구의 아이, 이웃의 조카, 교회의 학생, 학원에서 봤던 얼굴들.
한 집 걸러 장례식장, 한 골목 건너 울음바다.
단원고 정문 앞에는 노란 종이가 하나둘 붙기 시작했고, 학교 앞의 도로는 바리케이드 대신
“살려주세요”, “기다리고 있습니다”라는 피맺힌 문장으로 막혀 있었다.
그때 청와대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사라진 7시간’ 그 시간이 안산뿐 아니라 대한민국에서는 7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엄마 아빠들은 체육관으로 모여 아이의 이름이 호명되기를 기다렸다.
호명이 끝날 때마다, 누군가는 쓰러지고, 누군가는 오열했다. 기적은 오지 않았다.
국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해경은 학생들에게 “움직이지 말고 배에 있으라”고 방송했고, 그 말에 순순히 따랐던 아이들이
가장 먼저 배 안에서 죽어갔다. 구조하러 온 배는 없었고, 헬리콥터는 기자들을 태우기 바빴다.
대한민국은 그날, 아이들을 구조하지 않은 국가가 되었다.
사고 이후, 정부는 무엇을 했는가?
진상규명보다 은폐와 방해를 택했다.
기무사와 국정원은 유가족을 사찰했고, 청와대는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의 예산과 자료 제출을 거부했다.
심지어 유가족들의 단식을 향해 조롱과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아이들을 잃은 부모에게 “정치적 선동” 운운하던 정권.
그날 이후,
박근혜 정권은 더 이상 국민의 정부가 아니었다.
나는 가끔식 돈에근처에 있는 합동분향소를 지났다.
노란 리본이 나부끼는 길을 따라 학생들의 사진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망울을 마주칠 때마다 “국가는 어디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었다.
눈물은 그칠 날이 없었다.
안산 전체가 그 해, 온몸으로 울었다.
세월호 참사는 단지 해양사고가 아니었다.
정치적 무능, 행정의 부패, 인간에 대한 책임이 사라진 시스템 전체의 붕괴였다.
그날 이후, 우리는 “이게 나라냐”라고 물었다.
그리고 그 물음은 결국,
촛불이 되어 광장을 밝히는 분노의 불씨가 되었다. 기억은 힘이 센 법이다.
그리고 박근혜 정권 종말의 시작이었다. 또한 IMF와 함꼐 대한민국의 시스템과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사건이었다.
5. 굴욕적인 위안부 합의 – 피해자는 없고 외교만 남았다
2015년 12월 28일, 박근혜 정부는 일본 아베 정부와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전격 발표했다.
불과 한 시간 전에야 피해자 단체에게 전달된 이 사실은, 정작 합의의 당사자였어야 할 위안부 피해자들을 배제한 채, 정부 간의 이른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 발표는 누구를 위한 외교였는가? 역사적 진실을 위해서였는가, 아니면 국제 사회 앞에서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민족의 수치를 흥정한’ 외교적 거래였는가?
이 합의로 일본 정부는 10억 엔, 우리 돈으로 약 100억 원의 화해·치유재단 출연금을 제공하고, 아베 총리는 ‘책임을 통감한다’는 입장을 표명했지만, 정작 사죄는 없었고 법적 책임은 인정되지 않았다. 더욱이 일본은 이후 국제무대에서 "이미 한국과 합의했다"는 말을 면죄부처럼 사용했고, 그 결과 피해자들은 진정한 사과도, 명예 회복도 없이 다시 침묵 속에 밀려났다.
합의 직후, 일본대사관 앞에서 20년 넘게 진행돼온 수요시위 현장에는 분노가 들끓었다. 김복동 할머니, 이용수 할머니를 비롯한 당시 생존 할머님들은 언론 앞에서 “우리를 무시한 합의”,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외쳤고, 시민들은 정부에 대해 “도대체 누구를 위한 외교냐”며 피끓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이 모든 항의에 묵묵부답이었다. 오히려 한일 간 갈등을 끝냈다는 외교적 치적처럼 홍보했고, 이 합의를 문제 삼는 사람들을 “정치세력화된 반일 선동가”로 몰아붙였다. 심지어 외교부는 일본 정부의 책임 면제 조항을 해명하기에 급급했고, 피해자들을 설득하기보단 외면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화해·치유재단’은 출범부터 끝까지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 존재 자체가 피해자들의 고통을 ‘돈으로 환산한’ 증표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몇몇 피해자들의 동의가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이는 생계의 어려움이나 정부의 권위에 눌린 선택이었다. 전체적으로는 이 합의가 진정한 피해 회복이 아닌, 국가 간 거래에 불과했다는 인식이 강했다.
이후 문재인 정부에서 이 재단은 해산되었고, 이 합의는 국민의 기억 속에서 ‘굴욕외교의 대명사’로 남았다.
일본은 그 어떤 법적 책임도 인정하지 않았고, 이후에도 수차례 위안부 문제는 해결됐다는 입장을 반복했다. 그때마다 박근혜 정권의 이 합의는 한국 외교의 무릎 꿇은 흔적으로 소환되었다.
이 사건은 단순히 외교 정책의 실패가 아니다. 이는 정의롭지 않은 평화는 지속될 수 없다는 교훈, 그리고 피해자 없는 사과는 진실의 모독이라는 사실을 새긴 국가적 굴욕이었다.
6. 역사교과서 국정화 – 유신을 다시 쓰다
2015년 10월, 박근혜 정부는 전격적으로 중·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정부가 단 하나의 교과서를 집필하고 모든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사용하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박정희 정권 이후 사라졌던 국정 교과서 제도의 부활이었다. 아버지 박정희가 만든 유신 체제를, 딸 박근혜가 교과서로 정당화하려 한 것이다.
당시 교육부는 “교과서에 이념 편향이 있다”, “좌편향된 역사 서술이 학생들을 오도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국정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멀었다. 당시 검인정 교과서들은 다수의 역사학자들이 참여해 학계의 다양한 견해를 수렴한 결과물이었다. 문제가 있었다면 수정·보완할 수 있는 구조였지만, 박근혜 정권은 이를 '국가주의'와 '보수 이념'으로 덧칠한 하나의 정답만 있는 역사로 덮으려 했다.
특히 국정화 작업이 진행되면서 집필진이 비공개로 구성되었고, 명단조차 공개되지 않았다. 교육계와 학계는 즉각 반발했다. 한국사 연구자 90% 이상이 국정화를 반대했고, 전국 역사교사협회는 “이건 교실에 검열관을 들이겠다는 발상”이라며 규탄했다. 전국 중·고등학교에서는 ‘국정화 반대’ 현수막이 내걸렸고, 대학가와 촛불집회 현장에서는 “역사마저 권력의 하수인이 되게 할 순 없다”는 외침이 이어졌다.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광화문 광장에 나와 “우리는 유신의 교과서를 원하지 않는다”고 외쳤다. 시민들은 '역사를 팔아 정권을 연장하려는 시도'라며 분노했고, 일부 시민단체는 박근혜 정부를 헌법에 보장된 교육의 자율성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독재적 행위로 규정했다.
무엇보다 이 시도는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만을 강조하고, 유신독재와 인권 탄압, 민주주의 파괴의 역사는 축소 또는 미화하려 한 점에서 큰 우려를 낳았다. 독립운동가보다 친일 반민족 행위를 한 인물들이 더 비중 있게 서술되는 시안도 드러났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나 6월 항쟁의 서술 분량이 줄어드는 등, 권력이 기억을 통제하려는 명백한 기획이었던 것이다.
결국 국정화 교과서는 2017년 박근혜 탄핵과 함께 폐기되었다. 문재인 정부는 국정화를 폐지하고 다시 검인정 체제로 전환했다. 박근혜 정부의 역사전쟁은 패배로 끝났지만, 그 시도는 한국 민주주의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단지 교과서 한 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국민이 기억하고 평가해야 할 역사마저, 권력이 주도해 ‘편집’하려던 시도였다.
기억을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박근혜 정권은 그 미래를 유신의 과거로 되돌리려 했고, 시민들은 그 야망을 막아섰다. 이것이야말로 촛불의 전초전이었다.
7. 문화계 블랙리스트 – 사상의 자유를 검열하다
김대중 정부는 문화정책의 대전환을 이끌었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예술가의 창작 자유를 보장했고, 한국 영화, 음악, 게임, 문학은 새로운 르네상스를 맞았다. 이 문화정책은 노무현 정부로 이어졌고, 결국 한국은 ‘한류’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문화강국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은 이 모든 기반을 무너뜨렸다. 정권 비판에 입을 댄 예술인들을 분류하고, 지원 대상에서 배제하며, 문화계 전체를 검열했다. 그것이 바로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이었다.
박근혜 정부는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문화예술계 인사들 중 “정부에 비판적인 인사”, “세월호 시국선언 동참자”, “통합진보당 해산 반대자”, “고 노무현 추모콘서트 참여자” 등의 리스트를 만들어 각종 지원 사업에서 배제하기 시작했다. 이 리스트에는 문성근, 김미화, 이창동, 박찬욱, 김윤석, 공지영, 황석영, 김규리 등 수백 명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그 숫자는 9천여 명을 넘었다.
블랙리스트 작성과 실행은 청와대 민정수석실과 문화체육관광부, 그리고 국가정보원까지 동원된 정권 차원의 조직적 탄압이었다. 이 작업의 총책임자는 김기춘 전 비서실장, 실행에는 조윤선 문체부 장관이 깊숙이 관여했다. 이들은 예산 배분을 통제하고, 각종 문화예술 사업의 심사 결과를 조작했다. 정부 지원을 받아야만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예술가들에게, 사실상 생존권을 무기로 침묵을 강요한 것이다.
블랙리스트는 단순한 명단 작성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가 예술의 주제를 검열하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문화예술계에 각인시키려는 전체주의적 발상이었다.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정권이 노골적으로 유린한 사건이었다.
2016년, 박영수 특검팀이 이 사건을 수사했고, 김기춘과 조윤선은 결국 구속되었다. 법원은 “헌법의 핵심 가치인 표현의 자유를 정면으로 침해한 중대한 범죄”라며 유죄를 선고했다. 이 판결은 박근혜 정권이 어떤 수준까지 자유를 억압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무엇보다 이 사건은 단순히 개인의 피해가 아니라, 문화 자체를 정권의 하위 개념으로 만들려 한 시도였다. 국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예술가에게 생계의 밥줄을 끊는다는 발상은, 과거 유신정권의 문화통제와 다를 바 없었다. 유신의 망령은 박근혜 정권에서 다시 살아났고, 이 정권은 표현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숨통을 죄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억압이야말로 예술가들과 시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결국 촛불혁명의 열기 속에서 박근혜 탄핵의 정당성을 굳히는 데 기여했다. 국민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고, 예술은 다시 광장으로 나왔다. 연극 무대에서는 ‘이게 나라냐’가 울려 퍼졌고, 뮤지션들은 광장에서 노래했고, 시인은 마이크를 들었다. 표현의 자유는 죽지 않았고, 오히려 더 강해졌다.
박근혜 정권은 예술을 억압해 체제를 유지하려 했지만, 그 결과는 정반대였다. 예술은 권력을 꺾었고, 시민은 광장을 예술로 채웠다. 결국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던 이들이 승리했고, 권력의 목록은 역사의 심판대에 올랐다.
8. 사드 배치 – 졸속 외교, 국민 무시의 극치
2016년, 박근혜 정부는 한미 공동 기자회견을 통해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즉 사드(THAAD)의 한반도 배치를 공식 발표했다. 문제는 그 발표 이전까지 국민도, 국회도, 지방자치단체도 단 한 차례도 이 사안에 대해 제대로 보고받은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비공개로, 졸속으로, 일방적으로 진행되었다.
사드는 단순히 미사일 방어 체계를 넘는, 한반도의 군사적 지형과 외교 안보 정세를 뒤흔드는 사안이었다. 특히 중국은 사드를 자국을 겨냥한 전략무기로 규정하고 강력히 반발했다. 중국의 반응은 말 그대로 즉각적이었다. 롯데 면세점 철수, 한국 드라마·음악·연예인 전면 차단, 단체 관광객 금지, 한국 기업에 대한 비공식 경제 보복 등 대한민국 경제 전반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한류의 상징이었던 중국 시장은 순식간에 차단벽이 되어 돌아왔고, 관광산업, 화장품 산업, 자동차 산업이 큰 피해를 입었다. 사드 배치 한 번으로 수천억 원 아니 수조원의 경제 손실이 발생했고, 대한민국 중소기업들은 그 후유증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문제는 이 모든 과정이 국민적 합의 없이, 외교적 절차도 없이, 졸속적으로 강행되었다는 데 있다. 박근혜 정부는 지역 주민의 목소리를 철저히 무시했다.
사드 기지가 들어선 경북 성주와 김천 지역 주민들은 전자파, 토지 수용 문제, 군사적 위협에 대한 우려를 제기하며 끊임없이 반대 집회를 열었다.
하지만 정부는 이들을 “종북 좌파”, “외부세력”으로 몰아붙이며 국민의 정당한 저항을 탄압했다.
성주에서는 경찰과 주민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이어졌고, 그들의 일상은 군사시설과 시위, 경찰 통제로 황폐화되었다.
사드 배치의 결정은 박근혜 대통령의 외교 철학이 부재했다는 사실을 드러낸 상징이었다.
안보 정책은 국민의 생명과 국익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어야 하지만, 이 정권은 그것을 정치적 생존과 미국에 대한 충성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박근혜 정권은 국민의 안보 불안을 해소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불안을 창출했고, 동북아에서 한국의 전략적 자율성을 축소시켰다.
더구나 이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사드 발사대 개수 은폐, 국방부의 거짓 보고, 청와대의 직접 지시 정황 등이 드러나면서,
이 결정이 투명성·책임성·합법성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송두리째 무시한 채 이루어진 것임이 증명되었다.
사드는 여전히 대한민국 안보 정책에서 뜨거운 감자로 남아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 결정을 박근혜 정권이 일방적으로 강행했다는 점,
그리고 그 결과가 대한민국의 외교와 경제, 안보, 민주주의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는 점이다.
‘안보’라는 이름으로 국민을 위협하고,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자주권을 포기한 그 결정은
박근혜 정권이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최소한의 조건조차 갖추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치명적인 사례였다.
9. 최순실 게이트 – 국정의 사유화, 공화국의 붕괴
2016년 10월, JTBC의 한 보도가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다.
그 유명한 ‘태블릿 PC’ 보도였다.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문, 회의자료, 외교 기밀이 사전에 최순실이라는 일반 민간인에게 유출되고 있었고,
그녀는 공식 직책도, 아무런 권한도 없이 국가의 운영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이후 드러난 진실은 더 참혹했다.
최순실은 대통령의 친구이자 ‘비선 실세’로, 청와대 비서진조차 접근하기 어려운 국정 정보들을 마음대로 받아보고,
심지어는 장·차관급 인사에 입김을 넣었으며, 기업들에게 돈을 내도록 종용해 미르재단·K스포츠재단이라는 사적 조직을 만들었다. 이는 정권의 이름을 앞세운 국가기관의 조직적 사익동원이자, 헌법이 정한 권력분립과 민주주의 체계의 붕괴를 의미했다.
이 사태는 곧바로 국민적 분노로 번졌다.
그리고 마침내, 대한민국 현대사의 전환점이자 민주주의 시민이 헌법을 되찾기 위해 거리로 나선 ‘촛불혁명’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몇 백 명, 곧이어 몇 천 명, 그리고 몇 십만 명.
서울 광화문광장은 어느새 국민주권의 전당이 되었고, “이게 나라냐”는 절규가 전국을 뒤덮었다.
그 시위는 단 한 번도 폭력으로 얼룩지지 않았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청소하고, 노래하고, 피켓을 들고 행진했다.
그곳에는 진보와 보수가 없었고, 세대와 지역도 없었다.
모두가 대한민국의 주권자로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다.
그때의 국민이 요구한 건 단순히 한 사람의 사퇴가 아니었다.
공화국의 회복, 헌법이 말하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원칙의 복원, 그것이었다.
헌법재판소는 2017년 3월 10일, 재판관 8인의 만장일치로 “박근혜 대통령 파면”을 결정했다.
헌재는 판결문에서 “헌법 수호의 의지가 없는 대통령을 그대로 두는 것은 국가를 위해 위험하다”고 선언했다.
그날은 헌법이 살아있음을 입증한 날이자, 대한민국 시민이 광장의 주권자였음을 증명한 날이었다.
이 사태는 단지 한 사람의 도덕적 실패나 개인의 일탈이 아니었다.
그것은 박정희의 유산이자, 권위주의 유령이 다시 국가를 점령했을 때, 국가 시스템이 얼마나 허약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교과서였다.
박근혜는 국가를 지키는 대통령이 아니라, 국가를 사적으로 유린한 ‘비공식 체제’의 수장이었다.
그녀는 민주공화국이라는 헌정 질서를 파괴했고, 그 대가로 헌정사 최초의 탄핵 대통령이라는 치욕을 남겼다.
하지만 그 끝은 절망이 아니었다.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던 수많은 시민들은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헌법 1조를 현실로 바꾸었다.
촛불은 탄핵을 이뤄냈고, 탄핵은 역사를 다시 썼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시민의 손으로 다시 태어났고, 그 불꽃은 지금도 꺼지지 않고 있다.
10. 탄핵된 대통령, 민주주의의 적들
박근혜는 무너졌다. 그러나 그녀는 혼자였던 적이 없었다.
그녀를 대통령 자리에 올린 것은 단지 아버지의 유산만이 아니었다.
‘유신 신화’에 기대 정치적 부활을 꾀한 보수 정치 세력, 비판보다 추앙에 가까운 태도를 견지한 언론,
그리고 침묵하거나 방관했던 관료 시스템과 재벌들까지.
박근혜 정권은 민주주의에 반한 복합적 연합체였다.
그녀의 탄핵은 개인의 파면으로 끝나지 않았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헌법 질서의 회복이자, 국가 시스템을 재정비하는 시작이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최순실 게이트”라는 이름 하나로 묶어두어선 안 된다.
그건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 –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선언이 시민의 손에 의해 현실로 증명된 사건이자 혁명이었다.
박근혜는 민주주의를 이해하지 못했고, 권력을 사유화했고, 국정을 폐쇄된 ‘비선’의 손에 맡겼으며, 국민과 소통하지 않았고, 공적 책임이 무엇인지도 끝까지 외면했다.
그녀는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왕위처럼 착각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군주제가 아니다.
대통령은 주권자인 국민의 봉사자이며, 그 자리는 피와 투쟁으로 얻어진 민주주의의 결과물이었다.
우리는 박근혜를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그 기억은 비판과 경계로서의 기억이어야 한다.
그녀를 탄핵한 것은 법이 아니라, 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비 내리는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던 수많은 이름 없는 시민들이었다.
그 날,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은 정치의 주인이 누구인지, 권력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대한민국 헌정사에 새긴 선언이었다.
박근혜 정권은 민주주의의 적이었다.
그 정권은 공공성을 파괴했고, 권력을 탐욕과 무능의 도구로 삼았으며, 공화국을 ‘사적 네트워크’의 놀이터로 만들었다.
그러나 국민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광장의 촛불은 독재의 유산을 불태웠고, “이게 나라냐”는 절규는 “우리가 나라다”라는 희망으로 승화되었다.
박근혜는 탄핵당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탄핵은 그녀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모독했던 모든 낡은 체제와 그것을 용인했던 기득권 질서였다.
대한민국은 그렇게 다시 한 번 시민의 손으로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역사는 이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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