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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편파적인 한국현대사 – 나의 대통령 ⑥노무현 대통령

ziptory78 2025.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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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여정부의 탄생 민주정부 10년을 완성하다

200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는 이전의 그 어떤 선거보다 뜨거운 열기와 파격적인 흐름 속에서 진행되었다. 정통 정치 명문 출신도, 거대 재벌이나 언론의 지원도 없었던 한 인물이 돌풍을 일으켰다. 그 주인공은 바로 노무현이었다. 고졸 출신에 노동자의 편에서 인권변호사로 살아온 이력이 전부였던 그는, 당시까지만 해도 유력 대권주자들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원동력은 바로 시민이었다. 노무현은 국민참여경선제도를 통해 기존 정치문법을 무너뜨렸다. 정치 엘리트들의 담합이나 정당 지도부의 전략이 아니라, 일반 유권자들이 직접 참여한 경선 과정을 통해 대선 후보로 선출된 것이다. 이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정치 실험이었고, 결과적으로 시민이 후보를 만든다는 새로운 정치 문화를 창조해냈다.

그는 지역주의 극복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다. 특히 부산에서 민주당 깃발을 꽂아보겠다며 정치적 사각지대로 여겨졌던 영남 지역에 도전장을 던졌다. 이는 당시로선 무모한 시도로 보였지만, 지역 구도를 넘어서려는 진심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동시에 노무현은 부패하지 않은 정치, 국민과의 소통, 서민을 위한 정책이라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전달하며 유권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외부 환경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조선·중앙·동아일보로 대표되는 보수언론은 노무현에 대한 끊임없는 음해와 왜곡 보도를 일삼았고, 정치권의 기득권 세력 역시 그를 비주류로 낙인찍으며 배척했다. 특히 당시 대선 후반부,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 협상 과정에서 발생한 번복 사태는 선거판 전체를 뒤흔들었다. 정몽준이 선거일 전날 단일화 합의를 파기했지만, 노무현은 그 혼란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노무현을 지키자는 운동에 나섰고, 그 열기 속에서 대선 당일 그는 극적으로 승리하게 된다.

2002 12, 대한민국 최초로 지역주의·기득권·언론의 3중 장벽을 넘은 비주류 시민 대통령이 탄생한 것이다. 그의 승리는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었다. 이는 국민이 주권자로서 정치를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을 준 사건이었고, 한국 민주주의의 지평을 한층 넓힌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등장은 기성 정치질서에 대한 유권자들의 뚜렷한 문제의식과, 새로운 시대정신을 갈망하던 민심의 집약체였다. 그가 상징했던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구호는 단지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당시 수많은 시민들이 꿈꾸었던 진정한 민주주의의 상징이었다. 비록 임기 내내 숱한 고난과 공격을 겪었지만, 참여정부의 출범은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가장 시민적인 정권 탄생으로 길이 기억될 것이다.

 

2. 탄핵 소추와 복귀 헌정사 최초의 대통령 탄핵 가결

2004년 봄,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중대한 시험대에 올랐다. 바로 헌정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것이다.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참여정부의 대통령 노무현이었다. 겉으로 드러난 이유는 "총선을 앞두고 대통령이 정치적 중립을 위반하는 발언을 했다"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다분히 정치적이고 의도적인 탄핵이었다. 정권 창출 이후 줄곧 노무현 정부를 적대시해오던 한나라당(현 국민의힘)과 보수언론, 그리고 개혁에 반감을 가진 기득권 세력이 공동으로 가한 전방위적 정치 공격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4 3 8, 청와대 출입기자단과의 간담회에서 나는 열린우리당을 지지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고, 이는 선거 중립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해석됐다. 하지만 이는 여당과의 정책 추진 동반자 관계를 밝힌 수준의 발언이었고, 보수정당들 역시 선거철마다 유사한 수준의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중 잣대가 명백했다. 결국 2004 3 12, 야당 단독 주도로 국회에서 탄핵 소추안이 통과되며, 노무현은 대통령 직무가 정지된 상태에 놓였다. 대한민국 역사상 유례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 순간, 한국 사회는 혼란에 빠졌고, 동시에 시민들은 거대한 분노로 응답했다. 서울 광화문, 부산 서면, 광주 금남로 등 전국 곳곳에서 촛불이 타올랐다. 정치적 진영을 떠나 "이건 아니다"는 인식이 퍼져나갔다. 시민들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을 이렇게 쉽게 끌어내릴 수 있단 말인가라는 의문을 품었고, 이는 곧 헌정 질서에 대한 대중의 자발적 수호 운동으로 이어졌다.

당시 나는 매일 밤,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는 광장의 모습을 지켜보며 시민이 역사의 주체가 되는 순간을 목격했다. 중고등학생부터 노년층까지, 손에 촛불을 든 채로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고 외치던 그 함성은 한 시대의 분기점이었다.

헌법재판소는 5 14, 대통령의 선거 중립 위반은 인정했지만 탄핵 사유에 이를 정도의 중대한 위법은 아니다라는 판결을 내리고 탄핵을 기각했다. 그렇게 노무현 대통령은 직무에 복귀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헌정사에 있어 법률적 정의와 시민의 상식이 맞닿은 역사적 판결로 남았다.

노무현은 복귀 후 이번 일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와 시스템을 어떻게 다듬어갈지, 국민이 직접 그 방향을 제시한 사건이었다며 담담히 말했다. 실제로 탄핵 소추 이후 치러진 2004 4월 총선에서는 열린우리당이 제1당으로 약진하며, 국민들이 정권과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는 방식으로 응답했다.

그러나 탄핵 이후의 정치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복귀 후에도 대통령의 권위는 끊임없이 흔들렸고, 보수 언론과 야당은 여전히 그를 '탄핵당한 대통령'이라는 낙인으로 공격했다. 심지어 개혁 동반자를 자처했던 여당 내부에서도 대통령의 철학과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 이들이 많았다. 정치는 회복됐지만, 권력은 회복되지 못한 채 남는 역설적인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4년 탄핵 사태는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시민 민주주의의 위대한 승리로 남는다. 촛불을 든 국민들이 정치 권력을 감시하고, 부당한 권력 행사에 맞서 헌법을 지켜낸 것이다. 훗날 2016년 박근혜 탄핵을 이끌었던 시민 촛불은, 이때의 경험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 동북아 균형자론과 평화정책 한반도 평화를 향한 주체적 외교

노무현 대통령은 외교와 안보에 있어서도 기존 질서를 단순히 답습하지 않았다. 그는 대한민국이 동북아시아의 지정학적 중심에 위치한 국가로서,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서 균형 있는 외교를 펼쳐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동북아 균형자론이었다. 이는 단순한 외교 구호가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싼 냉전 구도와 패권 경쟁 속에서 대한민국이 종속적 위치가 아닌,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외교 행위자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그는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에 적극 참여했고, 북한과의 대화를 꾸준히 이어갔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이룬 첫 번째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노무현 정부는 2007년 두 번째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이 회담은 단순한 의례적 만남이 아니라, 개성공단 사업의 확장, 경의선 복원, 서해평화협력지대 조성 등 실질적인 남북 경협 방안을 논의한 중대한 회담이었다.

또한 노무현 대통령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추진,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비판적 대응 등에서 볼 수 있듯, 한국 외교의 독자성과 자주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이어갔다. 이로 인해 미국 보수 진영이나 국내 친미 보수층의 반발도 있었지만, 그는 흔들림 없이 대한민국은 더 이상 미국의 속국이 아니다라는 신념을 지켜나갔다.

이러한 외교 정책은 단기적으로는 큰 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한반도 평화 체제의 필요성과 외교 자주성의 중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재조명되고 있다. 특히 문재인 정부가 다시 추진한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대화의 토대 역시, 노무현 정부의 정책 유산 위에 놓여 있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평화정책은 단순한 이상론이 아니라, 군사적 긴장 완화와 경제 협력을 통한 실질적 안정 추구라는 측면에서 현실적 전략이기도 했다. 참여정부 시기의 이러한 노력은 이후에도 한국 외교의 방향성과 정체성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그가 꿈꿨던 '평화 번영의 한반도'는 여전히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으로 남아 있다.

 

4. 한미 관계의 재정립 전시작전권 환수 추진과 자주국방

노무현 대통령의 자주국방 철학은 대한민국은 미국의 속국이 아니다라는 강한 신념에서 출발했다. 한미동맹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곧 종속을 의미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이었다. 그는 특히 외교·안보 분야에서 한국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주권국가로서의 권위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전시작전통제권, 전작권환수 문제로 집약되었다.

한국군은 오랜 시간 동안 전시 상황에서 작전지휘권을 미국에 넘긴 상태였다. 이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전시지휘권을 유엔군사령부(사실상 미군)에 위임한 데서 기인한다. 그 이후 수십 년간 평시에만 한국군이 자체 지휘권을 행사하고, 전시에는 작전 지휘가 미국에 귀속되는 비정상적 구조가 유지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를 바로잡아야 할 시대적 과제로 인식했다. 전작권 환수는 단지 군사기술적 문제가 아닌, 자주국가로서의 정체성과 국민 자존의 문제였다.

2005년부터 본격화된 전작권 환수 논의는 참여정부의 안보정책에서 가장 상징적인 의제였다. 국방부와 외교부는 미국 측과 협의를 진행했고, 2007년 양국은 2012년까지 전작권을 한국이 환수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한국 안보정책사에 있어 획기적인 전환점이었다. 작전권 환수와 병행하여, 참여정부는 국방개혁 2020’이라는 이름의 중장기 개혁 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은 병력 감축, 무기체계 현대화, 합참 중심 지휘체계 정립 등 전면적 군 구조 개편을 포함하고 있었고, 한국군을 독자적 작전 수행이 가능한 수준으로 탈바꿈시키려는 청사진이었다.

하지만 이처럼 국가 안보 주권을 회복하려는 시도는 보수 세력과 언론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전작권을 환수하면 북한이 도발할 것”, “한미동맹이 약화된다는 식의 공포 마케팅이 난무했다. 조중동 등 보수 언론은 하루가 멀다 하고 노무현 정부의 안보관을 비난했고, 보수 야당은 자주국방이라는 이름으로 동맹을 파괴하는 행위라며 강하게 공격했다. 실제로 정치권과 언론, 보수단체를 중심으로 전작권 환수 반대집회와 여론전이 이어졌고, 많은 국민들이 혼란에 빠졌다.

결국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전작권 환수는 무기한 연기되었다. 이명박 정부는 한미동맹 강화라는 이름 아래, 참여정부가 추진했던 자주국방 전략을 사실상 폐기했다. 2010년 천안함 사건 이후에는 전작권 환수 계획이 사실상 좌초되었고, 이후 박근혜 정부를 거쳐 문재인 정부에 이르기까지도 이 문제는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전작권 환수 추진은 단지 국방개혁이나 군사전략의 문제가 아니라, 한 나라의 주권이 어디까지 회복될 수 있는가에 대한 시대적 질문에 던진 답변이었다. 그는 전쟁을 할지 말지를 우리가 결정하지 못하는 나라에서, 과연 대통령은 누구이며, 군 통수권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이는 단지 국방 지휘 체계의 개편이 아니라, 국가의 주권과 독립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던지는 정치철학이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 전작권 환수의 필요성은 점점 더 널리 공감받고 있다. 특히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복잡해지는 오늘날, 노무현의 참여정부가 당시 던졌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자주국방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국민의 생명과 주권을 지키는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임을, 참여정부는 누구보다 먼저 실천하려 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다.

 

5. 국익을 위한 결단 이라크 파병과 한미FTA

노무현 대통령의 외교 철학은 이상주의와 현실주의가 공존하는 독특한 조화를 이뤘다. 그는 평화와 자주 외교를 강조하면서도, 국제정세와 국익을 고려한 실용적 결단을 내릴 줄 아는 지도자였다. 그 상징적 장면이 바로 이라크 파병과 한미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이다.

이라크 파병은 국내 진보 진영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의 일방적 침공에 한국이 가담하는 모양새가 된다는 점에서, 도덕성과 주권의 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한미동맹의 전략적 신뢰를 유지해야 한다는 현실적 필요와, 한국의 글로벌 역할 확대라는 국가적 과제를 함께 고려했다. 그는 파병 조건으로 재건 임무 중심’, ‘전투배치 지양’, ‘독자 작전권 유지등을 명확히 설정했고, 자이툰 부대는 이라크 아르빌 지역에서 실질적인 복구 활동을 수행하며 현지 주민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이어 추진된 한미FTA 역시 국내 논란이 컸다. 노동계와 농민 단체는 미국과의 자유무역이 일방적인 시장 개방으로 귀결될 것을 우려했고, 일부 시민사회는 국가 주권의 침해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철저한 이익분석과 협상 전략을 통해 한국이 손해 보지 않는 조건을 관철시키려 노력했다. 특히 서비스 산업의 국제경쟁력 강화, 지식재산권 제도 정비, 투자 유치 환경 개선 등의 부가 효과를 기대했다.

이 결정은 단기적으로는 정치적 부담이 컸지만, 장기적으로는 대한민국 경제의 글로벌화를 앞당긴 중요한 계기로 평가된다. 이후 한국은 미국 외에도 EU, 중국, 아세안 등과 잇따라 FTA를 체결하며, 무역 국가로서의 입지를 강화했다. 현재 한미FTA는 한국 수출의 핵심 축이 되었고, 글로벌 경제 체제 내에서 한국의 전략적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이라크 파병과 한미FTA 체결은 그가 이념에 매몰되지 않고 국익과 현실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지도자였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외교와 경제라는 복잡한 퍼즐 속에서 그는 타협과 원칙, 그리고 용기 있는 결정을 통해 참여정부의 실용성과 주체성을 함께 증명해냈다.

 

6. 독도 연설 일본 극우세력의 야욕을 꺾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수많은 연설을 남겼지만, 그 중 가장 전율을 일으켰던 장면 중 하나는 2006 4,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맞선 대국민 특별담화였다. 당시 일본 시마네현이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고, 자민당 내 강경 보수 세력들이 독도를 자국 영토라 주장하며 외교적 도발을 지속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외교부가 항의했지만 일본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국민들의 분노는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이때 노무현 대통령은 침묵 대신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청와대에서 생중계된 대국민 담화에서 그는 단호히 말했다. “독도는 대한민국의 영토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지리적으로도, 국제법적으로도 명백한 우리의 땅입니다. 일본의 잘못된 주장과 역사 왜곡을 우리는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연설은 단지 영토 분쟁에 대한 대응을 넘어, 일본 극우세력이 주도하는 과거사 왜곡과 군국주의 부활에 대한 경고였다.

특히 그는 일본 정부의 태도 변화를 촉구하면서도, 양국 국민 간의 우호 관계는 지켜져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단호함과 절제, 논리와 감정을 균형 있게 담은 이 연설은 국민의 자존심을 세워주었고, 국가 지도자로서의 품격을 다시 한번 각인시켰다.

당시 보수 언론조차 노무현 대통령의 이 담화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 외무성은 일시적으로 대응 수위를 낮췄고, 국내에서는 이 정도로 강경하고 당당한 대통령을 본 적이 없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외신 역시 "한국 대통령이 영토 문제에서 이례적으로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고 보도하며, 아시아에서 점차 강화되는 영토 분쟁 이슈 속에서 한국이 결코 약한 나라가 아님을 각인시켰다.

노무현 대통령의 독도 연설은 단순히 한 번의 외교적 대응을 넘어, 영토주권과 역사 인식의 문제를 전면에 제기한 사건이었다. 그는 영토는 곧 국민의 존엄이라는 신념 아래, 국가의 리더로서 책임을 다하는 모습으로 기억되었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제스처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더 이상 과거처럼 침묵하거나 물러서지 않는다는 메시지였으며, 이후 독도 문제에 대한 국민적 인식과 자부심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39) 지금 다시 들어보면 강력했던 노무현 대통령 독도 관련 명연설 - YouTube

 

 

7. 권위주의 정치문화 극복 소통하는 대통령의 상징

대한민국의 정치문화는 오랜 시간 동안 권위주의라는 그늘 아래 있었다. 대통령은 청와대라는 높은 담장을 두르고 국민 위에 군림하는 존재였고, 정치인은 국민과의 거리보다 권력과의 거리를 더 중시했다. 이런 정치 풍토에서 국민과 수평적인 관계를 맺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선언은 그 자체로 혁명적이었다.

그는 대통령이 된 직후부터 나는 권위적인 대통령이 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양복 대신 셔츠 차림으로 출근했고, 각종 회의에서 고개를 숙이고 메모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권위적 의전을 줄이고, 청와대 비서관들과 격의 없이 토론하며 회의를 주재했다. 연설 중 실수를 인정하고, 답변 중 모르겠다고 말하는 모습은 이전 대통령에게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장면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국민과의 소통을 원했다.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국민과의 대화라는 코너가 개설되었고, 대통령에게 직접 질문하고 의견을 보낼 수 있었다. 인터넷 포털 다음(DAUM) 아고라 게시판에 올라온 글을 실제로 읽고 답변한 일화도 유명하다. 한 네티즌이 대통령님,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라는 비판적 글을 올리자, 청와대는 그 글을 대통령이 읽었다고 밝히며 직접 설명하는 자료를 공개하기도 했다.

심지어 그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국민과의 생방송 대화를 시도했다. 대통령이 대본 없이 시민들의 질문에 실시간으로 답변하는 모습은, 대중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가감 없는 말투, 때로는 격정적인 목소리, 고민하는 눈빛, 그리고 그건 제 잘못입니다라는 말. 그는 말뿐 아니라 태도로도 국민과 함께하는 정치를 실천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늘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기득권 언론은 그의 말투를 두고 품격이 없다”, “감정적이다라고 공격했고, 정치권에서는 국정 운영의 기본이 안 되어 있다는 비판도 이어졌다. 대통령이 지나치게 국민들과 가까워지려 한다는 비꼼, 격을 잃었다는 폄하도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사람들은 깨닫기 시작했다. 그가 했던 방식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의 일상화였다는 것을. 청와대가 절대 권력의 상징이 아니라, 국민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소통의 공간으로 바뀌고 있었던 것. 그의 방식은 대통령의 권위를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권위주의를 해체하여 권위를 되찾는 과정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참여정부라는 명칭 자체에 그의 정치철학을 담았다. 그는 정부가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국민은 수동적으로 따르는 구조가 아닌, 국민이 직접 참여하고 함께 책임지는 새로운 민주주의 모델을 꿈꿨다. 그것은 단지 정치 형태의 변화가 아니라, 정치 문화 자체를 바꾸려는 시도였다.

그의 이런 실험은 이후 디지털 정치의 발전, 열린 정부의 개념, 시민참여 플랫폼 구축 등으로 이어졌고, 특히 문재인 정부 시절에는 청와대 국민청원이라는 방식으로 재현되었다. 그 씨앗은 노무현이 뿌린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대통령이 유튜브를 통해 소통하고, SNS를 통해 정책을 설명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흐름의 출발점, ‘정치는 국민과 함께하는 것이라는 명제를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고 실천했던 대통령은 바로 노무현이었다. 그는 단순히 소통을 잘하는 대통령이 아니라, 소통의 정치 자체를 새롭게 정의한 인물이었다.

 

8. 지역주의 청산과 지방분권 세종시와 혁신도시 추진

노무현 대통령이 정치를 시작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바로 '지역주의 정치'였다. 그는 경남 김해 출신이었지만, 부산에서 정치에 도전하며 수차례 낙선을 겪어야 했다. 당시의 한국 정치는 지역이 곧 정치 성향을 결정짓는, 폐쇄적이고 기형적인 구조였다. 그는 이를 민주주의의 적이라 불렀고, 지역주의를 타파하지 않는 한 한국 정치는 결코 성숙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대통령이 된 이후, 지역주의를 구조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정책을 국가 과제로 삼았다. 그 핵심이 바로 지방분권행정수도 이전이었다. 수도권에 집중된 인구, 자본, 행정 권력을 분산시켜야만 국가의 균형 발전이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단순한 정치 구호가 아닌, 구조 개혁을 통한 정치 문화와 사회 시스템의 전환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 구상을 구체화하기 위해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추진했다. 바로 오늘날의 세종시다. 수도권 과밀화를 해소하고, 국토 균형 발전을 이루겠다는 비전 아래, 주요 정부 부처를 충청권으로 이전하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이라는 거센 장벽에 부딪혔다. 수도 이전은 헌법 개정 사항이라는 논리가 받아들여지면서, 행정수도의 법적 명분은 무너졌다.

그러나 노무현은 포기하지 않았다. ‘행정중심복합도시라는 명칭으로 계획을 수정했고, 기존 서울에 있는 부처 중 일부를 세종시로 분산 배치하는 형태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이 싸움은 수도권 대 지방의 싸움이며, 기득권과 미래 세대의 싸움이라고 선언했고, 절절한 어조로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그때마다 보수 언론과 수도권 정치권은 전국을 쪼개려 한다”, “경제 비효율을 초래한다고 비난했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행정중심복합도시와 더불어 추진된 정책이 혁신도시건설이었다. 공공기관을 지방으로 이전해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고, 지역 내 자생적 성장 기반을 만들기 위한 대규모 정책이었다. 전북에는 한국국토정보공사, 강원에는 건강보험공단, 경남에는 한국전력기술 등 수십 개의 기관이 전국 각지로 이전했다. 이것은 단지 기관의 물리적 이동이 아니라, 지역에 고급 일자리를 만들고 인프라를 구축하는 혁신적인 시도였다.

이러한 지방분권 정책은 단기적으로 큰 혼란과 반발을 수반했지만, 장기적으로는 대한민국 국토의 균형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특히 세종시는 이후 문재인 정부에서 본격적으로 완성되었고, 2020년대 들어 국회 세종의사당 설립 논의까지 이어지며 사실상 행정수도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노무현이 불가능이라 불리던 과제를 되게만든 것이다.

그는 늘 수도권만을 위한 국가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지방도 서울처럼 살 수 있어야 한다는, 너무나 상식적인 요구를 그는 국가정책으로 끌어올렸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해관계자들과 충돌했고, 오랜 갈등과 실패를 경험했지만, 그는 타협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도시를 옮기는 문제가 아니라, 공정한 나라, 미래를 준비하는 국가를 만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수도권 집중 문제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만약 그때 노무현이 지방분권이라는 씨앗을 심지 않았다면, 지금의 논의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한 도시의 대통령'이 아닌, '대한민국 전체를 위한 대통령'이 되고자 했다. 세종시와 혁신도시는 그 의지의 증표이며, 지금도 그의 철학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9. 전자정부 완성 디지털 혁신과 행정 개혁

노무현 대통령은 디지털 기술이 단지 산업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심화시키고 국가를 더 효율적으로 만드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철학은 단순한 정보화 정책을 넘어서, 정부 구조 자체를 디지털 기반으로 재설계하겠다는 강한 의지였다. 이는 곧 전자정부 구축이라는 이름으로 구체화되었다.

전자정부는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시작된 국가정보화 프로젝트의 연장선에 있었지만, 노무현 정부는 이를 행정개혁과 연결지어 한 단계 도약시켰다. 그의 목표는 명확했다. 국민이 언제 어디서든 정부 서비스를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공무원 사회의 비효율성과 부패 가능성을 줄이며, 투명한 행정을 실현하는 것.

노무현 정부는 모든 행정정보 시스템을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전자정부 통합 플랫폼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민원24, 홈택스, 전자입찰 시스템(KONEPS), 온라인 행정서비스 등은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정비되고 확대되었다. 특히 국세청, 조달청, 행정자치부 등 핵심 부처들이 빠르게 디지털화되면서, 과거에는 서류를 들고 관공서를 찾아다니던 시대에서, 클릭 몇 번이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대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국민의 편의성을 넘어서, 정부의 투명성과 효율성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렸다. 조달청의 전자입찰 시스템은 부정부패의 온상으로 지적되던 관급 공사의 입찰 과정을 투명하게 바꾸었고, 국세청의 홈택스는 세무 행정의 신뢰도를 높이며 탈세를 줄이는 데 기여했다. 각종 사회보험 조회, 민원 처리도 온라인을 통해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며, 국민은 정부를 느린 권력이 아닌 일 잘하는 조직으로 체감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노무현 정부의 전자정부는 정보 격차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함께 녹아 있었다. 단순히 기술만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모든 국민이 공평하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인식 아래, 디지털 소외 계층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인터넷 보급 확대, 공공장소에서의 PC 접근성 강화 등의 정책이 병행되었다. 다시 말해, 정보화가 또 다른 차별을 만들어내지 않도록 설계된 포용적 정보 정책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전자정부가 가져올 민주주의의 진화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정보의 독점은 권력의 독점이며, 정보의 개방은 권력의 분산이다라는 말을 자주 인용했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홈페이지는 대통령에게 직접 의견을 보낼 수 있는 통로가 되었고, ‘국민과의 인터넷 대화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소통 방식이었다. 권력자와 국민 사이의 벽을 허물기 위해, 기술이 가진 가능성을 가장 정치적으로 활용한 지도자였던 셈이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대한민국은 2004 UN이 발표한 전자정부 평가에서 아시아 1, 세계 5위를 기록했고, 2005년에는 OECD 전자정부 지수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이는 결코 외형적인 성과에 그치지 않았다. 전자정부는 시민이 정부에 더 많이 접근할 수 있게 만들었고, 정부 역시 시민을 더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권력이 정보 속에서 작동하고, 정보가 권력을 통제하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종종 나는 대통령으로서 대한민국을 정보화된 나라, 일 잘하는 정부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회고했다. 그의 이 말은 단순한 자부심이 아니라, 시대를 앞선 철학의 고백이었다. 그가 구축한 전자정부는 이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정부를 거쳐 계속 진화해왔고, 2020년대 디지털 정부와 AI 행정으로 이어지는 흐름의 뿌리가 되었다.

전자정부는 결과적으로 행정혁신의 한 축을 넘어, 권력구조의 변화를 추동하는 도구가 되었고, 노무현은 그 출발을 이끈 지도자였다. 디지털이 기술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한 도구임을 가장 앞서 이해하고 실천했던 정치인. 바로 그것이 노무현 대통령의 가장 강한 유산 중 하나였다.

 

10. 태안 기름유출 사고 대응 국민과 함께한 재난 극복

2007 12, 충청남도 태안반도 앞바다에서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해양 환경 재난이 발생했다. ‘허베이 스피리트(Hebei Spirit)’호 기름 유출 사고. 1만 톤이 넘는 벙커C유가 바다로 쏟아져 나왔고, 태안군 일대 100km에 달하는 해안선은 찐득한 검은 기름에 뒤덮였다. 수많은 어민들의 생계가 순식간에 끊겼고, 천혜의 해양 생태계는 망가졌다. 바다를 삶의 터전 삼아 살아가던 사람들의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참사는 단순한 환경오염을 넘어, 국가가 어떻게 재난을 인식하고 대처하는지, 국민과 정부가 위기 앞에서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묻는 시험대가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사고 직후, 재난 대책을 총괄할 컨트롤타워를 신속히 구성하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민간의 자원을 총동원할 것을 지시했다. 무엇보다 그는 국가의 존재 이유는 국민의 고통에 가장 먼저 다가가는 것이라는 신념 아래, 사고 발생 초기부터 진두지휘하며 대응을 이어갔다. 해양경찰, 군부대, 환경부, 지방자치단체 등이 협력하여 방제 작업에 착수했고,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자발적으로 현장에 달려간 수많은 시민들의 존재였다.

추운 겨울,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자원봉사자로 나섰다. 대학생, 직장인, 중고등학생, 심지어 어린아이를 데리고 나온 가족까지대한민국의 평범한 시민들이 기름때 묻은 바닷가에 무릎을 꿇고 손수 스펀지로, 걸레로, 맨손으로 기름을 닦아냈다. ‘태안 자원봉사는 곧 하나의 국민적 운동으로 확산되었고, 이는 단순한 방제 작업을 넘어선 공동체 회복의 장이 되었다.

국민과 함께한 재난 대응은 단지 사고 복구를 넘어서, ‘공공의 문제를 함께 풀어가는 시민 민주주의의 힘을 다시금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정부는 단기 복구에 그치지 않고, 장기적인 생태 복원 계획과 어민 지원 정책을 병행했다.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된 태안은 긴급 예산이 투입되어 어민 생활 안정, 생태 복원, 관광 회복 등에 대한 실질적 지원이 이루어졌으며, 이후 몇 년에 걸쳐 생태계가 서서히 회복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태안 기름유출 사고는 참여정부 후반기에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이었지만, 그에 대한 대응은 위기의 순간에도 공동체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가장 아름다운 대답을 보여준 사례였다. 이는 참여정부가 위기 대응에서 보여준 투명성과 시스템, 그리고 시민과의 신뢰에 기반한 협력이 가능했기 때문에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결과였다.

훗날 이 사고를 회고하며, 많은 시민들은 국가가 우리를 외면하지 않았고, 우리는 그 믿음에 응답했다고 말했다. 바로 그것이 노무현 대통령이 꿈꾸던 사람 사는 세상의 진짜 얼굴이었다.

 

11. 남북정상회담과 개성공단 평화의 경제를 열다

2007 10 2, 노무현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출발해 군사분계선을 도보로 넘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이 육로를 걸어 넘어 북측 땅에 발을 디딘 순간이었다. 전 세계가 이 장면을 지켜봤고, 분단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감히 넘지 못했던 선을 한 시민 출신 대통령이 직접 넘은 것이다. 바로 제2차 남북정상회담의 시작이었다.

이 회담은 김대중 대통령의 2000 1차 정상회담 이후 7년 만에 열렸다. 많은 이들이 회담의 성사 자체를 반신반의했지만, 참여정부는 집권 초부터 일관되게 평화체제 구축을 국정 기조로 삼아왔고, 북핵 문제와 국제 정세의 흐름 속에서도 원칙을 유지하며 물밑 교섭을 이어왔다. 그 결실이 바로 이 가을, 평양에서 맺어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회담 전부터 평화를 말만 하지 않고, 경제로 증명하겠다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전달해 왔다. 이번 정상회담 역시 단순한 선언적 만남이 아닌, 실질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그 중심에 있었던 것이 바로 개성공단이었다.

사실 개성공단의 착상은 김대중 정부 말기부터 존재했지만, 본격적인 설계와 착공, 그리고 입주 기업의 생산 가동까지 연결시킨 것은 참여정부의 전략과 실행력 덕분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개성공단을 단순한 경제협력사업이 아닌 평화의 경제, 분단의 극복 프로젝트로 인식했다.

개성은 서울에서 불과 70km 떨어진 지점이다. 휴전선 바로 위에 위치한 이곳에 남측 자본과 기술, 북측의 인력이 함께 공장을 세우고 물건을 생산한다는 것은 상징 이상의 함의를 지녔다. 이는 전쟁이 아닌 협력으로, 적대가 아닌 공존으로 가는 구체적 실험이었다.

2004년부터 시범단지에 입주한 몇몇 기업들이 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했고, 참여정부 후반기에는 본격적인 확대 방안이 논의되었다. 특히 2007년 정상회담을 통해 개성공단 2단계 개발, 서해 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 경의선 철도 운행 활성화 등 추가적인 경협 확대 계획이 합의되면서, 개성공단은 단순한 산업단지를 넘어 남북 경제공동체의 출발점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노무현 대통령은 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분단의 벽을 낮추는 것을 넘어서, 그 벽을 활용해 경제적 이익을 함께 창출하는 공동체를 구상하고 있다. 이것은 그 자체로 평화를 만들어가는 일이며, 더 이상 적이 아닌 동반자로 북측을 대한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물론 회담과 개성공단 추진은 국내에서 많은 비판도 받았다. “퍼주기다”, “북한 정권을 도와주는 일이다라는 보수진영의 공격이 잇따랐다. 그러나 참여정부는 이러한 프레임에 흔들리지 않았다. 개성공단의 실질적 효과는 무엇보다 평화를 경제로 연결시킨 유일한 사례라는 점에서 평가받는다. 적대 관계 속에서도 기업들이 입주하고, 노동자가 일하고, 철도가 운행되며, 전화기가 울리고, 물류가 오가는 경험을 처음 만든 것이다.

개성공단은 이후 이명박 정부에서 확장 중단, 박근혜 정부에서 전면 중단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그 존재는 여전히 남북 협력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유일한 성공 사례로 남아 있다. 문재인 정부 시기에도 개성공단 재개는 가장 중요한 평화정책 과제로 꼽혔으며, 이는 노무현 정부가 남긴 외교·안보의 구조적 유산이라 할 수 있다.

남북정상회담과 개성공단은 그 자체로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장면이다. 말과 선언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었던 남북 화해의 길을, 행동과 제도, 그리고 경제를 통해 구체화한 사건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은 장면은, 단지 한 사람의 용기만을 보여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는 갈라진 역사를 협력으로 회복할 수 있다는 국민과 시대정신의 선언이었다. 그 한 걸음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평화였다.

 

12. 참여정부의 의미와 평가 낡은 질서에 맞선 가장 고독한 전쟁

참여정부는 사람사는 세상을 꿈꾼 정부였다. 노무현이라는 한 인간이 대통령이 되어 펼쳐낸 5년은 단순히 정책의 나열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구조적 모순과 낡은 권력 구조를 정면으로 부딪고 해체하려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그는 기득권의 언어로 말하지 않았고, 국민과의 수평적인 소통을 시도했다. 사법고시를 패스한 인권변호사 출신이었지만, 대통령이 되어서는 대한민국 헌정사상 가장 비권위적인 대통령으로 기억된다. 청와대를 국민에게 개방하고, 기자들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고, 인터넷을 통해 국민과 직접 소통한 대통령. 이 모든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이었고, 지금도 회자되는 민주주의적 실험이다.

그러나 그러한 진정성은 늘 제도화된 저항에 부딪혔다. 국회는 과반을 차지했던 시기도 있었지만, 기득권 정치와 보수 언론, 그리고 관료제와 검찰의 견제는 거셌다. 탄핵 사태에서 보았듯, 그를 흔들려는 시도는 임기 초부터 끊임없이 이어졌다. 개혁입법은 번번이 저지당했고, 언론은 그의 모든 정책에 비판적 프레임을 덧씌웠다. 심지어 서민 대통령이라는 그의 진정성을 희화화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평가의 눈은 시간이 흐르며 달라지고 있다. 참여정부가 추진한 전자정부는 이후 대한민국 디지털 행정의 기초가 되었고, 개성공단은 남북 경제협력의 유일한 실현 모델이 되었으며, 전시작전권 환수는 국방 주권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노무현 정부의 평화정책은 이후 문재인 정부의 남북정상회담과 북미 대화의 토대가 되었고,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은 여전히 대한민국이 풀어야 할 과제임을 보여준다.

한편, 이념에 치우치지 않고 실용주의를 앞세워 이라크 파병과 한미FTA 체결을 감행한 결단은 당시에는 논란이 되었지만, 훗날 대한민국의 외교적 위상과 경제적 확장을 이끈 토대가 되었다. 노무현은 가치와 현실의 경계에서 길을 찾으려 했던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그는 퇴임 후에도 조중동 등 보수 언론, 검찰, 정치권의 끊임없는 공격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결국 2009 5 23, 그의 죽음은 대한민국 사회 전체에 커다란 충격을 안겼고, 많은 국민들이 뒤늦게 그의 진심과 비전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그가 생전 말했던 역사는 앞으로 나아간다는 말은, 이제는 그의 유산을 기억하는 이들의 철학이 되었다.

노무현은 정치를 바꾸려 했던 대통령이었다. 그는 대한민국의 기득권 구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것을 바꾸는 유일한 길은 시민의 각성과 참여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의 정부는 참여정부였다.

그가 남긴 유산은 단지 정책이 아니라 정치의 방향에 대한 철학적 제안이었다. 정치는 국민을 두려워하고, 권력은 통제받아야 하며, 국가는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그 원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이제 안다. 노무현은 실패한 대통령이 아니라, 시대를 앞서간 대통령이었다. 그의 외침과 정책, 그리고 고독한 싸움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진화를 위한 눈부신 발자국이었고, 우리 모두가 함께 기억해야 할 역사이다. 온전히 시민을 위한 대통령이었던 그를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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