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편파적인 한국현대사 – 나의 대통령 ⑤ 김대중 대통령

ziptory78 2025. 3. 23.
728x90

1. 1997년 대선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

김대중은 세 번 낙선한 대통령 후보였다. 감옥에 갇혔고, 가택연금을 당했고, 암살 시도도 겪었다. 전두환 정권 하에서는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는 다시 나왔다. 1997, IMF 외환위기로 나라가 흔들릴 때, 그 혼돈의 시기에 그는 네 번째 도전을 시작한다. 누구는 집요하다했고, 누구는 위험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를 지지한 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바꿔야 한다.”

그해 대선은 단순한 선거가 아니었다. 군사정권의 유산과 민간 정치의 싸움, 기득권과 시민사회의 대결, 과거와 미래의 분기점이었다. 한쪽에는 경제 대통령을 자처한 이회창이 있었다. 전 대법관, 국무총리, 군 출신 아들 논란에도 불구하고 안정을 상징했다. 반면 김대중은 모든 보수 언론이 빨갱이프레임을 씌운 인물이었다. 조중동은 노골적으로 경고했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공산화된다.”
물론 헛소리였다. 하지만 그 거짓은, 지역감정과 맞물려 공포의 정치로 기능했다. 지금도 살아남아 있다.

이 선거에서 김대중은 선택한다. 김종필과 손을 잡는다. DJP 연합. 5·16을 혁명이라 말한 사람과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손을 잡은 장면은, 충격이자 혼란이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그가 택한 건 정권교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 민주주의의 생존이었다. 그가 말했듯 정권을 잡지 못하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그의 대선 전략은 분명했다. 호남을 기반으로 충청과 수도권을 묶고, 일부 중도층과 노동계의 지지를 끌어온다. 당시 이인제가 국민신당 후보로 출마해 표가 갈렸지만, 김대중은 수도권과 충청, 호남에서의 압도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승리를 거머쥔다.

1997 12 18. 김대중, 40.3%. 이회창, 38.7%. 불과 1.6% 차이. 하지만 이건 단순한 수치가 아니었다.
이날, 대한민국은 처음으로 시민의 손으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총칼 없이, 쿠데타 없이, 야당이 집권한 첫 번째 순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와 전두환을 거쳐, 직선제를 이끌어낸 김영삼까지. 그 모든 흐름 위에서, 드디어 민주주의가 승리를 거머쥔 날이었다.

김대중은 말한다. “이제는 국민이 이긴 것이다.”

 

 

2. IMF를 이겨낸 사람들 김대중과 국민의 기적

1998, 대한민국은 한마디로 절망이었다. 거리에는 실직자가 넘쳐났고, 자영업자들은 연쇄 폐업을 했으며, 기업은 줄도산을 피할 수 없었다. IMF 외환위기, 그것은 단순한 경제 위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국민의 일상, 가족, 존엄,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흔든 국가적 재난이었다. 바로 그 한복판에서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었다. 그것도, 수차례의 낙선과 고문, 망명과 투옥을 이겨내고 얻은 기회였다. 누구도 그가 이 엄혹한 시대에 국가를 맡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위기에서 도망치지 않고, 전면으로 나아갔다.

그는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곧바로 IMF와의 고통스러운 협상을 받아들였고, 한편으로는 대한민국 경제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개혁을 시작했다. 과감한 금융 구조조정, 재벌 개혁, 기업의 부채 감축, 외환시장 자율화, 모든 것이 속전속결로 이루어졌다. 그 무엇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루에도 수천 명이 일자리를 잃는 현실 앞에서, 개혁이라는 말은 때때로 비정하게 들렸다. 그러나 김대중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위기를 직시했고, 모든 정치적 리스크를 자신이 짊어졌다. 개혁의 고통은 오롯이 그의 책임이었다.

그가 그토록 강할 수 있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국민이었다. 김대중은 국민을 믿었다. 그리고 국민은 그 믿음에 응답했다. ‘금 모으기 운동은 그 상징이었다. 어린아이가 돼지저금통을 털고, 노부부가 결혼반지를 내놓고, 길거리에 선 사람마다 나라가 살아야 우리가 산다고 말했다. 그것은 단순한 모금이 아니었다. 국민이 정부와 함께 위기를 극복한 행동하는 민주주의였다. 대통령이 나서고, 국민이 따랐고, 그렇게 한국은 다시 일어섰다.

놀랍게도, 대한민국은 단 3년 만에 IMF 체제를 졸업했다. 2001, 김대중 정부는 빌렸던 외화를 전액 조기 상환했다. 이는 세계 경제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성장률은 다시 두 자릿수를 기록했고, 무너졌던 기업들은 재편되었으며, 외국인 투자도 다시 유입되기 시작했다. 국제사회는 이 기적에 경외감을 표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그것이 결코 자신의 공이 아니라고 말했다. “국민이 해낸 일입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김대중의 경제 리더십은 단지 수치를 회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너진 자신감을 되살리고, 고통 속에서도 품위를 지켜낸 이들의 이야기를 지켜주는 방식이었다. 그는 국가를 구했고, 국민은 대통령을 신뢰했다. IMF라는 절망의 끝에서, 우리는 김대중이라는 지도자와 함께 희망이라는 문을 열 수 있었다.

 

3. 정보화 혁명과 IT 강국의 초석 – ‘인터넷은 민주주의다

김대중 정부의 집권 초기, 대한민국은 IMF 외환위기의 충격에서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제조업 중심의 경제 구조는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았고, 노동 집약형 산업은 동남아 국가들에게 경쟁력을 뺏기고 있었다. 그가 주목한 것은 단 하나, 정보통신 기술, ICT였다. 그는 정보화가 새로운 경제 성장의 동력이자 민주주의의 기반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정책이 아니라, 김대중이라는 지도자의 세계관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1999, ‘IT 강국 실현을 위한 정보화 추진 계획을 발표하며 전면적인 디지털 혁신을 시작했다. 무엇보다 초고속 인터넷 인프라 구축에 집중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던 광대역 통신망의 전국 확대가 그 핵심이었다. 정부는 민간 통신사들의 투자 여력을 끌어내기 위해 통신 시장을 단계적으로 개방하고, 각종 세제 혜택과 규제 완화를 단행했다. 그 결과, 2002년까지 전국 대부분의 가정에서 초고속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 속도와 보급률을 자랑하는 나라로 탈바꿈했다.

이러한 인프라는 곧 산업 생태계의 지형을 바꾸기 시작했다. 네이버, 다음, 싸이월드, 한메일 등 지금은 익숙한 기업들이 이 시기 급속도로 성장했다. 창업 초기에는 소규모 벤처에 불과했던 이들이, 정부의 적극적인 육성과 벤처캐피털 정책, 그리고 정보통신부의 스타벤처 프로젝트등을 통해 시장의 중심으로 올라서게 된다. 2000년대 초반 닷컴 붐은 단순한 거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부 주도의 정보화 전략과 국민의 빠른 적응력이 만들어낸 새로운 성장 동력이었다.

또한 김대중 정부는 전자정부 도입에도 박차를 가했다. 공공행정에 인터넷 기반 시스템을 도입하여 행정의 효율성과 투명성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온라인 민원 처리, 전자세금계산서, 전자입찰 시스템, 범정부 통합 포털 등이 이 시기에 구축되었고, 이는 오늘날 대한민국이 디지털 행정 선진국으로 불리는 기반이 되었다. 실제로 UN 전자정부 평가에서 한국은 2003년 세계 1위를 기록했다.

IT 인재 양성도 병행되었다. 정부는 전국 초··고등학교에 컴퓨터와 인터넷을 보급하고, 교사들에게 정보화 연수를 실시했다. 전국민 정보화 교육을 위한 사이버 교육센터가 문을 열었고, 각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정보화 마을’, ‘PC방 육성사업등을 통해 시민 누구나 인터넷에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디지털 격차를 줄이기 위한 국가 차원의 노력이었다.

김대중은 단순히 IT산업으로만 본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것이 민주주의와 정보 평등, 시민의 참여를 가능하게 할 플랫폼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인터넷은 이 시기부터 한국 사회에서 여론 형성과 정치 참여의 핵심 공간으로 자리 잡게 된다. 노사모, 온라인 커뮤니티 기반 정치운동, 시민사회 단체의 온라인 캠페인 등은 모두 이 시기의 산물이다. 그는 인터넷은 민주주의를 앞당긴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그 신념은 이후 전자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회자된다.

김대중 정부의 정보화 혁명은 대한민국이 개발도상국에서 지식정보사회 선도국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단순히 기술을 보급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정체성과 미래 전략을 정보화로 재설계한 정부였다. 이 모든 것이 국민의 삶을 바꾸었고,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으며, 글로벌 경쟁력의 원천이 되었다.

 

4. 사회안전망의 기초를 놓다 기초생활보장제도와 건강보험 통합

IMF 외환위기는 단순한 경제 위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국민의 일상과 삶의 질을 근본부터 흔들어버린 사회적 재앙이었다. 수많은 기업이 쓰러졌고, 실업자가 넘쳐났으며, 하루아침에 생계가 막막해진 가정이 전국을 뒤덮었다. 특히 비정규직, 영세 자영업자, 노년층, 여성 가장 등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러한 상황을 단순히 경제 회복이라는 이름으로 덮을 수 없다고 보았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처럼, 그는 이 참혹한 경제 파국의 시기를 복지국가로 도약할 전환점으로 삼았다. 그 핵심에 있었던 것이 바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였다.

2000 10 1, 대한민국 복지사에서 역사적인 날이 도래했다. 이날부터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시행되며, 생계유지가 어려운 국민에게 최저 생계비를 국가가 보장하는 제도가 공식화되었다. 이전까지의 생활보호제도는 시혜적이고 선별적이었다. 구걸하듯 자격을 증명해야 했고, 공무원의 눈치를 봐야 했다. 그러나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이를 완전히 뒤집었다. ‘권리로서의 복지를 선언한 것이며, 복지를 자격이 아니라 당연한 권리로 바꾼 최초의 시도였다.

이 제도는 단순한 생계비 지급에 그치지 않았다. 의료급여, 교육지원, 주거비, 자활사업 등 종합적 복지 체계로 설계되었다. 당시 보건복지부와 국회, 시민단체, 학계가 협력하여 치열한 논의와 제도 설계를 진행했고, 김대중 대통령은 이에 전폭적인 정치적 의지를 실었다. 단순한 선심성 복지가 아니라, 사회적 연대의 틀을 바꾸는 국가 차원의 구조 개혁이었던 셈이다.

기초생활보장제도와 함께 또 하나의 중요한 개혁이 이뤄졌다. 바로 건강보험 통합이다. 이전까지 한국의 의료보장 체계는 직장, 지역, 공무원, 교직원 등 여러 직역으로 나뉘어 있어 보험료와 급여 수준이 달랐고, 형평성에 큰 문제가 있었다. 김대중 정부는 이를 하나로 묶는 건강보험 통합을 단행했고, 2000 7,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출범했다. 이는 대한민국이 전 국민 의료보장 체계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한 걸음이었다.

이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의료계의 반발은 격렬했고, 일부 보수 언론은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라며 비난을 쏟아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설득과 논리를 포기하지 않았고, 국가의 역할이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임을 명확히 했다. 그는 경제는 시장에 맡기되, 생존은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이런 복지정책은 단기적으로 재정 부담을 안겼지만, 장기적으로 한국 사회가 겪는 불평등과 양극화에 제도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건강보험 체계, 기초생활수급제도, 의료급여제도의 많은 부분은 김대중 정부 시절 뿌리를 내린 제도적 유산이다.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일은 화려하지 않다. 일자리처럼 즉각적인 성과를 보여주지도 못한다. 그러나 국민의 삶을 지탱하는 뿌리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란다. 김대중 정부의 복지 개혁은 그 뿌리를 깊고 단단하게 내리는 과정이었다. 그는 위기 속에서도 사람을 먼저 생각했고, 그 철학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5. 연평해전과 내무반 TV – 전쟁의 공포와 평화의 가능성이 교차한 순간

1999 6, 서해 북방한계선(NLL)에서 포성이 울렸다. 이른바 1차 연평해전이라 불리는 이 충돌은 단순한 해상 분쟁이 아니었다. 이는 냉전의 잔재로 남아 있던 군사적 긴장이 현실화된 순간이었다. 북한 경비정들이 북방한계선을 무시하고 반복적으로 침범하던 가운데, 대한민국 해군은 확고한 군사적 대응을 결정했고, 결국 양측이 교전으로 치달았다.

당시 나는 군 복무 중이었다. 유격훈련 중에 들려온 "해상 교전 발발"이라는 소식은 우리 부대를 단번에 긴장 속으로 몰아넣었다. 전우들은 농담을 멈췄고, 장교들의 지시가 단호해졌으며, 우리는 마치 지금이라도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각오로 전투배치 점검을 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평상시였던 일상이, ‘비상이라는 낯선 단어로 뒤덮이는 순간이었다.

연평해전의 결과는 명확했다. 우리 해군은 침범한 북한 경비정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다수의 부상자와 전사자가 발생했다. 그로부터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우리는 내무반 TV 앞에 모여 있었다. 그날은 2000 6 13.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사상 첫 남북 정상회담을 갖는 날이었다. 우리는 모포를 뒤집어쓴 채, 텔레비전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 땅에 발을 내딛는 장면을 숨죽이며 지켜봤다. 그리고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김정일이 활짝 웃으며 김대중의 손을 잡고 포옹한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당혹감과 희망이 뒤섞인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전날까지 주적이라 배웠던 인물과 우리 대통령이 손을 맞잡고 웃고 있었다. 주변 전우들도 침묵했지만, 누구도 저게 뭐야?”라고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짜 이게 전쟁이 끝나는 건가?”라는 희미한 기대가 감돌았다. 군인인 우리가 을 이해하게 된 것이 아니라, ‘평화라는 단어의 무게를 처음 체감한 순간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은 단순한 외교 이벤트가 아니었다. 이는 남북 간 대결 구도에서 공존의 길로 전환하려는 중대한 첫 걸음이었다. 이 회담을 통해 남북은 6·15 공동선언을 발표했고, 이산가족 상봉, 경의선 복원, 개성공단 개발 등 구체적이고 지속적인 협력의 토대를 마련했다. 햇볕정책의 정점이자,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감동적인 평화의 장면 중 하나였다.

이 장면은 이후 대한민국 정치사에도 큰 그림자를 드리웠다. 누군가는 김대중의 손을 퍼주기라 폄하했고, 이후 보수정권은 남북 화해 정책을 대체로 철회하거나 후퇴시켰다. 하지만 그날, 내무반 TV 앞에 모여 있던 우리 병사들에게는 단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었다. 우리가 겪은 훈련, 전투태세, 경계근무, 그 모든 것 위에 평화는 더 큰 가치였다.

전쟁과 평화, 군사와 외교, 총성과 악수.
그 모든 대비가 엇갈린 그 시기에, 대한민국은 적과의 대화라는 새로운 선택지를 택했고, 김대중은 그것을 실현한 첫 대통령이었다.

 

6. 노벨평화상과 국정원의 음모 위대한 순간과 비열한 흔적

2000 12,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전 세계가 지켜보는 오슬로 시청에서, 김대중은 남북 화해와 민주주의 발전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아 노벨상을 받은 것이다. 그는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한국 국민과 함께 이 상을 받는다.”

이 수상은 개인의 영광이 아니었다. 그것은 군사독재를 이겨낸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경의였고, 전쟁 위기를 넘어 평화로 가고자 했던 한반도에 대한 희망이었다. 특히, 불과 몇 달 전 북한 김정일과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6·15 공동선언을 이끌어낸 직후였기에, 이 상은 동아시아 전체에 평화의 가능성을 제시한 상징으로 해석됐다.

하지만 대한민국 내부의 반응은 마냥 경사롭지 않았다. 오히려 보수 진영과 일부 언론은 이 위대한 순간을 폄하하고 왜곡하기에 바빴다. “퍼주기로 받은 상”, “사전 로비가 있었다는 음모론이 돌았고, 김대중이 국제 사회를 속여 상을 받았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의혹이 확산됐다. 무엇보다도 충격적인 사실은, 이처럼 노벨평화상에 대한 음해를 정부 기관인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주도했다는 점이다.

뒤에 기술하겠지만,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겨냥한 좌파 무력화공작을 실행에 옮겼다. 국정원 내부 문건에 따르면, 이들은 김대중의 노벨상 수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해외 학자 및 언론 대상의 프레이밍 작업을 계획했고, 국내에서도 보수 단체를 활용해 여론을 왜곡하려 했다. 실제로 2009,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하자, 일부 보수 세력은 조문을 막으려 했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와는 달리 국가애도 분위기를 거부하거나 폄훼하는 움직임이 감지됐다.

이러한 행위는 단순한 정쟁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인물의 업적을 넘어, 한국 민주주의의 성취를 깎아내리고, 시민의 기억에서 민주 진영의 긍정적 유산을 지우려는 시도였다. 노벨평화상은 전 세계가 한국 민주주의를 인정한 상징이었다. 하지만 그 가치를 인정하지 못한 자들은 역사의 진보가 불편했던 기득권 세력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생전에 내가 받은 노벨평화상은 한국인 전체가 함께 받은 것이라 말했지만, 그가 떠난 후에도 일부 정치 세력과 기관은 이를 조직적으로 부정하려 했다. 그 정점에 이명박 정권 하의 국정원이 있었고, 이들은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기관의 권력을 사적으로 활용해 역사 지우기에 몰두했다.

이것은 단지 김대중 한 사람에 대한 공격이 아니었다.
민주주의, 평화, 인권, 화해 우리가 쌓아온 모든 가치를 흔들려는 시도였고, 동시에 정치의 가장 추한 민낯이었다.

노벨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품었던 의미, 그 순간의 감동, 세계가 대한민국을 향해 보냈던 찬사도 지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찬란한 순간을 질투하고 조직적으로 지우려 했던 자들의 이름과 행위도 함께 기록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7.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과거를 직시하고 미래를 연 용기 있는 외교

1998, 대한민국과 일본은 격동의 전환점을 맞았다. 해방 이후 반세기 넘게 대립과 불신이 이어졌던 한일 관계 속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정면 돌파를 택했다. 단순한 외교적 수사로 과거를 덮기보다는, 과거를 직시하고 미래를 함께 설계하는 용기 있는 선언을 시도한 것이다. 바로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이었다.

이 선언의 핵심은 명확했다. 일본의 과거 식민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 그리고 한국의 미래 지향적 파트너십 선언.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는 공식적으로, 그리고 문서로, “과거 한일 간의 불행한 역사에 대해 깊은 반성과 사죄를 표명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전례 없는 일이었다. 단 한 번도 일본 총리가 그렇게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한국에 사과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은 그 사과를 받아들인다고 선언했다. 한국 정치 지도자가 사과를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일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보수 세력은 면죄부를 준 것이라 비난했고, 일부 진보 진영도 과거사에 대한 정의 없는 화해는 공허하다고 반발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과거에 발목 잡힌 외교는 미래를 만들 수 없다. 사죄를 끌어냈다면, 이제 우리는 그 위에서 새로운 길을 열어야 한다.”

그는 감정의 정치가 아니라, 책임의 정치로 외교를 풀어갔다.

공동선언 이후, 한국과 일본은 경제·문화 분야에서 파격적인 협력을 시작했다. 특히,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라는 민감한 과제를 김대중 대통령은 결단했다. 수십 년간 금지되어 있던 일본의 영화·음악·만화·게임 콘텐츠가 점차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부에서는 한국 문화가 일본에 잠식당할 것이라는 위기론이 돌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한국 문화 콘텐츠가 일본의 자극을 발판 삼아 더 강해졌고, 이는 훗날 한류 열풍의 씨앗이 되었다.

또한 공동선언을 통해 IT, 금융, 관광, 안보 등 다방면의 실질 협력이 이루어졌고, 이는 아시아 국가 간 협력 모델로 회자되었다. 일본 내에서도 이 선언은 외교적 진일보로 평가받았다. 물론 일본의 정치 변화로 인해 이후 이 선언의 정신은 퇴색되기도 했지만, 한일 양국 간 신뢰 회복의 골든타임은 분명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중심으로 존재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사과를 받아내기 위한 외교적 기술자가 아니었다. 그는 미래를 설계하는 통찰의 정치인이었다. 한일관계는 단순히 두 나라의 외교 문제가 아니었다. 아시아 평화와 동북아 협력의 열쇠였고, 그는 그 문을 열었다. 때론 외교는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보다, 용서의 언어로 진실을 이끌어내는 것이 더 어렵고 위대한 일이다. 그는 그 어려운 길을 걸었고, 그 성과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국제적 위상과 평화 기반의 일부가 되었다.

이 선언은 단순한 외교 문서가 아니다.
그것은 과거에 발목 잡히지 않으면서도, 그 과거를 회피하지 않는, 김대중식 리더십의 정수였다.
그러나 이후 정권들은 이 정신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했고, 한일관계는 다시 냉각기를 맞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미워해도, 그 사람이 말한 진실까지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이 바로 그런 진실의 순간이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기억이다.

 

8. Y2K와 세기말 혼란 불안을 넘어서 희망으로

1999년의 대한민국은 이상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거리엔 크리스마스 캐롤이 흘러나왔고, 신문과 방송은 새 천년에 대한 기대를 말했지만, 동시에 사람들의 마음속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막연한 공포가 있었다. ‘Y2K’, 혹은 밀레니엄 버그라는 단어는 매일 뉴스의 헤드라인에 올랐고, 사람들은 마치 종말이 다가오는 것처럼 불안에 휩싸였다.

Y2K는 기술적 문제였다. 2000년이 되면 컴퓨터 시스템이 ‘00’ 1900년으로 오인해, 금융망과 통신망, 공공시스템이 모두 마비될 수 있다는 우려였다. 전 세계가 긴장했고, 특히 디지털 사회로 빠르게 나아가던 한국은 타격이 클 것이라는 예측이 쏟아졌다. 비행기가 떨어지고, 은행이 멈추고, 병원 수술이 중단되고, 원자로가 폭발할 수도 있다는 루머까지 돌았다.

당시 나는 군복무 중이었고, 부대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 부대 간부들은 12 31일 밤을 준전시체제로 준비했고, 전 장병이 비상 대기 상태에 들어갔다. 부대 내 방송 장비, 전력 장치, 통신체계 점검이 반복되었고, 정말로 휴거가 오는 것 아니냐는 농담 같은 진담이 나돌았다. 세기말이라는 단어는 그때의 공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기대와 공포, 희망과 혼란이 뒤섞인, 말 그대로 경계선의 시간이었다.

이런 혼돈 속에서 김대중 정부는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움직였다. 1999년 초부터 대통령 직속으로 ‘Y2K 대응 종합상황실을 설치하고, 각 부처와 민간 기업에 체계적인 점검을 지시했다. 컴퓨터 시스템 업그레이드, 백업 시스템 구축, 응급 대응 매뉴얼 제작 등 국가 차원의 전면적인 기술 검증 작업이 시작되었다. 또한 김대중 대통령은 불안감을 조장하지 말고, 정보는 투명하게 공개하되 과장 없이 대응하라는 원칙을 세웠고, 정부는 모든 준비 상황을 국민에게 상세히 알렸다.

은행, 병원, 교통, 에너지, 통신 등 핵심 인프라를 중심으로 철저히 대비한 결과, 1999 12 31일 자정이 넘는 순간에도 대한민국은 단 한 건의 시스템 장애 없이 2000년을 맞이했다.

그 순간을 기억한다. TV에서는 각국의 새해맞이 축제가 생중계되고 있었고, 대한민국도 평온한 가운데 카운트다운을 외쳤다. 부대 내무반에서는 이제 됐구나하는 안도와 함께, ‘그래도 세상은 계속된다는 조용한 감탄이 흘렀다. 사람들은 새해, 평소처럼 출근했고, 버스는 제시간에 도착했다. 세상은 끝나지 않았고,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Y2K를 가장 안정적으로 넘긴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이 모든 성과의 중심엔 김대중 대통령의 위기관리 능력이 있었다. 그는 국민의 불안을 과장하지도, 무시하지도 않았다. 기술적 문제를 정치화하지 않았고, 민관이 협력할 수 있도록 조정했다. 이는 정치 지도자가 위기 앞에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범 사례로 남았다.

Y2K는 결과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김대중 정부는 얼마나 치밀하고 세심하게 움직였는가. 위기는 때때로, 준비된 자 앞에선 조용히 지나간다. 그리고 그 조용함이야말로 가장 큰 지도자의 업적일지도 모른다.

 

9. 문화강국 대한민국 한류의 시작은 국가의 결단이었다

1998, 김대중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문화는 국민의 삶이고, 미래의 성장 동력입니다. 문화가 국력입니다.”
이 짧은 말 한마디에 김대중 정부의 문화철학이 집약되어 있었다.
그는 경제위기의 혼돈 속에서도 문화에 대한 투자를 중단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 문화에 베팅했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겪은 뒤, 사람들은 빚 갚기구조조정에만 몰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는 달랐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문화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보았고, 창조산업을 미래 먹거리로 키우겠다는 명확한 국가 전략을 세웠다.

가장 먼저 변화가 감지된 곳은 게임 산업이었다.
IMF
로 인해 수많은 제조업이 주저앉던 시기, 전국 곳곳의 PC방에서는 스타크래프트와 리니지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김대중 정부는 이를 청소년 탈선으로만 보지 않았다. 오히려 IT 인프라 확대와 콘텐츠 산업의 성장 가능성으로 보았다.
1999
년 문화부는 게임산업진흥법을 제정했고, 정부는 e스포츠 진흥 정책을 공식화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세계 최초로 e스포츠를 제도권에 편입시킨 나라가 되었고, 훗날 ‘e스포츠 종주국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다.

같은 시기, 대한민국 영화계에도 르네상스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999
년 《쉬리》가 6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 영화 최초의 천만영화 가능성을 열었고,
이후 《공동경비구역 JSA, 《친구》,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등 대작들이 연이어 성공했다.

이처럼 한국영화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김대중 정부의 철학이 있었다.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
이 단순하고도 명쾌한 원칙은, 창작자들에게 자유를, 산업에는 활력을 불어넣었다.
영화진흥위원회를 독립적인 조직으로 세우고, 영화 투자와 제작지원, 상영 인프라 확충을 통해 민간 창작 생태계의 자율성을 보장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뿐인가.
김대중 대통령은 한일 관계의 해빙과 함께 일본 대중문화의 단계적 개방을 선언했다.
당시 반일감정이 여전히 강했기에 일본 문화 개방은 문화 주권을 팔아넘기는 일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열린 마음으로 경쟁해야 우리가 더 강해질 수 있다.”

1998 10, 그는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와 함께 발표한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에서
일제 식민 지배에 대한 일본의 통절한 반성과 사죄를 이끌어내는 동시에, 양국 문화 교류 확대에 합의했다.
이 선언은 단순한 외교 이벤트가 아니었다.
한국 콘텐츠 산업이 글로벌 경쟁에 본격 진입할 수 있도록 문을 연 사건이었다.

당시 걱정과는 달리, 일본 콘텐츠가 한국 문화를 잠식하긴커녕
오히려 한국 드라마와 영화, K-POP이 일본 시장을 역으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겨울연가》의 욘사마 열풍, BoA의 일본 데뷔 성공, 그리고 이후 동방신기, BTS까지
모두 이때의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문화가 곧 국력이라는 말.
그것은 그저 비유가 아니라, 김대중 정부가 정책으로 증명해낸 시대적 선언이었다.
경제가 무너진 시기, 대한민국은 정신과 감성의 힘으로 일어섰고,
그 에너지는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1998, 우리는 겨우 IMF를 벗어나고 있었고,
2002
, 우리는 한일월드컵에서 세계인을 감동시키는 문화강국이 되어 있었다.

그 시작에는 문화는 국력이다라는 철학을 품은 한 지도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김대중이었다. 가장 김구 선생님 같은 지도자가 아닐까.

 

10. 김대중이라는 이름 민주주의의 완성자, 평화의 리더, 시대의 교양

김대중. 그 이름은 곧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다.
그는 세 번의 죽음의 문턱을 넘었고, 네 번째 도전 끝에 마침내 대통령이 되었다.
누군가는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만,
그 운조차 끈질기게 버티고, 설득하고, 물러서지 않은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임을 우리는 잘 안다.

그는 군사정권에 맞서 싸우며 고문당했고,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수차례의 연금과 망명을 견뎌야 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복수하지 않았다.
그는 이기려 하지 않았다.
그는 설득하려 했고, 껴안으려 했다.
적에게조차 대화를 청한 정치가,
동시에 국민에게는 평등과 자존을 이야기한 지도자였다.

그가 집권한 1998년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절이었다.
국가부도의 위기, 구조조정의 공포, 대량 실업과 자영업 몰락,
사람들은 가난보다 절망에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희망의 언어로 시작했다.
할 수 있다. 국민이 위대하다. 우리는 반드시 이겨낼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금 모으기 운동으로 국민은 응답했고,
정부는 구조조정과 개혁, 산업 재편으로 실력을 키웠고,
한국은 세계 역사상 가장 빠르게 IMF를 졸업한 나라가 되었다.

그는 경제를 살렸을 뿐 아니라, 문화와 정보화의 엔진을 돌린 지도자였다.
IT
인프라를 깔고, 벤처 붐을 일으켰으며,
게임, 영화, 대중문화, 그리고 한류의 기반을 마련했다.
한국은 더 이상 흑백TV와 산업재벌의 나라가 아니었다.
스타크래프트와 싸이월드, 쉬리와 겨울연가, 초고속 인터넷과 IT 강국의 이름으로
대한민국은 디지털 아시아의 리더로 다시 태어났다.

그는 복지를 이야기했다.
기초생활보장제도를 도입하고, 의료보험을 통합했으며, 사회적 약자를 위한 최소한의 국가책임을 제도화한 지도자였다. 그것은 단순한 정책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인간답게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철학의 실천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평화를 선택했다.
한반도에 전쟁 대신 햇볕을, 증오 대신 악수를 건넸고, 남북의 정상은 처음으로 서로를 인간으로 대면했다. 2000 6, 평양 땅에서 이루어진 역사적 만남은 단지 두 지도자의 악수가 아니라, 분단의 50년을 끌고 온 상처들이 처음 마주한 순간이었다.

그에 대한 공격은 끊이지 않았다.
퍼주기”, “빨갱이”, “좌파 대통령이라는 수식어들이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그는 싸우지 않았다. 그는 이해시키려 했고, 설명하려 했고, 결과로 증명하려 했다.
그리고 그는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되었다. 한반도 역사상, 아니 아시아 현대사에서 그처럼 가장 고통받았던 정치인이 가장 고귀한 상을 받은 사건은 없다.

그의 정치는 이기기 위한 정치가 아니었다.
지키기 위한 정치였고, 사람을 위한 정치였으며, 시대를 위한 정치였다.
누군가는 그는 지나치게 이상주의자였다고 평가하지만,
그 이상은 결코 허상이나 공상이 아니었다.
그가 남긴 정책, 제도, 철학, 그리고 영혼의 흔적은 오늘의 우리가 누리는 일상 그 자체가 되어 있다.
대한민국이 경제를 넘어 문화강국이 되었고, 분단을 넘어 평화를 꿈꾸게 되었으며,
복지를 넘어서 존엄을 이야기하게 된 오늘의 배경에는 김대중이라는 한 사람의 외로운 싸움이 있었다.그는 대통령이기 전에 교양인이었고, 지도자이기 전에 독서인이었고, 철학가였고, 시민이었다.

그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실패했지만, 이 길은 맞다고 믿는다.”

그렇다.
우리는 아직 그 길의 끝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그가 걸었던 그 길 위에서 민주주의를 배우고 있고,
그의 시선으로 이 땅의 약자를 보고 있으며, 그가 지켰던 헌법의 가치를 다시 새기고 있다.

이 글은 그를 위한 헌사가 아니다. 그가 믿었던 가치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증명이고,
그의 외로움이 헛되지 않았음을 우리 모두의 언어로 새기는 기록이다. 김대중은 물러섰지만,
그의 길은 우리에게 남겨졌다.

728x90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