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편파적인 한국현대사 - 나의 대통령 ③ 노태우
1. 1987년 대선 – 6월 항쟁 이후 다시 군인이 대통령이 되다
1987년 대한민국은 거대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6월 항쟁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시민들은 더 이상 군사정권의 억압을 용인할 수 없었고, 전국적인 시위는 마침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냈다. 이는 6월 민주항쟁이 만들어낸 가장 큰 성과였지만, 문제는 새로운 정치 체제 아래에서 또다시 군 출신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는 점이었다.
대선이 다가오자 신군부 출신이자 전두환의 후계자로 지목된 노태우가 민정당 후보로 나섰다. 그는 “보통사람의 시대”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우며 본인의 군 출신 경력을 희석하려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12.12 군사반란과 5.18 학살을 함께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당시 야권은 김영삼과 김대중이 끝내 단일화에 실패하며 표가 갈라졌고, 결국 노태우는 36.6%의 지지율로 당선되었다. 군부독재에 맞서 싸운 시민들이 직선제를 쟁취했음에도, 정권의 야비한 선거 전략과 야권의 분열이 맞물리며 신군부 세력이 다시금 집권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KAL 858기 폭파 사건은 이 선거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선거 직전, 대한항공 여객기가 미얀마 상공에서 폭파되었고, 정권은 이를 북한의 소행으로 발표했다. 이 사건은 단순한 테러가 아니라 선거 개입을 위한 공작이었다는 의혹이 지금까지도 제기되고 있다. 선거 기간 내내 안보 위기가 강조되었고, 이는 보수층이 노태우에게 표를 던지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했다. 결국, 6월 항쟁으로 만들어진 직선제는 시민들이 원했던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 아니라, 또 다른 군 출신 지도자를 탄생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이따 난 국민학교 3학년 즈음이었는데, 친구들이 태우 아저씨 그러면서 다니던 기억이 난다. 봉통사람이 먹히긴 했던 모양이다. 서울 끝트머리 존밭이 대부분이었던 곳. 보통사람이 뭐 였을까.

2. 5공 청문회 – 노무현이라는 스타의 탄생
1988년 총선에서 야당이 승리하자, 국회는 5공 청문회를 열어 전두환·노태우 군사독재의 실체를 규명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청문회는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독재 정권의 수장과 핵심 인물들이 국회에서 심문을 받는 모습이 TV를 통해 생중계되었다.
이 과정에서 국민들이 가장 인상 깊게 본 장면 중 하나는 노무현 의원과 전두환의 대결이었다. 당시 초선 의원이었던 노무현은 날카로운 질문과 집요한 태도로 전두환을 몰아붙였고, 그에 반해 전두환은 오만한 태도로 일관했다. “기억이 안 난다”, “보고받지 못했다”는 전두환의 발언이 반복될수록 국민들의 분노는 커졌다. 결국, 이 청문회는 군사정권이 얼마나 비윤리적이고 부패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으며, 동시에 노무현이라는 정치 스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청문회가 끝난 후, 실질적인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군사정권의 핵심 인물들이 법적 처벌을 받기는커녕, 여전히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이 이어졌으며, 이는 노태우 정권이 5공 청산을 제대로 수행할 의지가 없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3. 3당 합당 –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야합 정치와 그 후유증
1990년,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가장 기형적인 합작이 성사되었다. 노태우의 민정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공화당이 손을 잡고 3당 합당을 이루며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민자당)이 탄생한 것이다. 이 합당은 단순한 정당 연합이 아니라, 한국 정치의 구조 자체를 뒤틀어놓은 사건이었다. 무엇보다도, 군부독재에 맞서 싸워온 김영삼이 군부 세력과 손을 잡았다는 점에서 충격적이었다. 김영삼을 지지했던 수많은 민주화 세력과 시민들은 배신감을 느꼈고, 이는 이후 한국 정치의 지역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김영삼이 경남·부산 지역을 기반으로 한 정치인이었기에, 그가 3당 합당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영남(특히 경남·부산) 지역이 군사정권과 결합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3당 합당 이전까지만 해도 경남 지역은 독재 정권에 대한 저항 의식이 강한 곳이었다. 부마항쟁(1979년)에서 부산과 마산(현재 창원)의 시민들은 박정희 유신체제에 맞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이는 유신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김영삼이 3당 합당을 통해 군부 세력과 손을 잡으면서, 부마항쟁을 일으켰던 민주화의 중심지였던 경남이 오히려 보수 성향으로 기울어지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보수란 말도 이때 나왔다고 본다. 군사독재를 보수로 포장하고 김대중을 진보로 몰아세웠다. 김대중은 개혁적 보수라고 자신을 정의했었다. 대한민국의 보수와 진보라는 개념이 이때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김영삼을 따르던 민주화 세력도 이때부터 희한한 계보가 되면서 완전 꼬였다고 보면 되겠다.
이로 인해 이후 대한민국 정치에서 “보수 = 영남, 진보 = 호남”이라는 기형적인 지역 구도가 고착화되었고, 이는 정치적 갈등을 더욱 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3당 합당은 단순한 정당 재편이 아니라, 대한민국 정치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민주주의 발전을 가로막은 결정적 사건이었다.

4. 노태우의 유산 – 5공 청산의 실패와 ‘물태우’의 한계
노태우는 스스로를 “보통사람의 대통령”이라 칭했지만, 실상은 전두환의 연장선에 불과했다. 그는 5공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결국 대한민국 정치가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막았다. 그가 대통령으로 있던 동안, 군사정권과 연결된 여러 문제들이 해결되지 못했으며, 민주주의적 발전 역시 정체되었다.
퇴임 후, 그는 전두환과 함께 비자금 조성 혐의로 구속되었다. 한때 대통령이었던 두 사람이 법정에 서는 모습은 대한민국 정치의 부패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태우는 군사독재의 한 축을 담당했던 인물로서 역사적으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의 집권은 6월 항쟁 이후 민주주의가 도약할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고,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 중 하나를 허비하게 만든 실패한 정권으로 기록될 것이다.
노태우 정권은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본격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치고, 오히려 군부독재의 연장선에서 정치적 후퇴를 가져왔다. 3당 합당은 그 결과를 더욱 왜곡했고, 한국 정치의 지역주의 구도를 영원히 고착화시켰다. 결국, 노태우는 ‘보통사람의 시대’가 아닌, ‘군사정권의 마지막 잔재’로 역사에 기록될 수밖에 없었다.
물태우답게 별 사건사고도 생각나는게 없다. 그리고 나도 어렸었고, 그저 88올림픽 정도 생각난다. 아 SK가 이때부터 크기 시작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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