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편파적인 한국현대사 - 나의 대통령 ② 전두환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독재자, 그리고 한국 민주주의의 최대 걸림돌"
1. 12.12 군사반란 – ‘구국의 영웅’을 자처한 쿠데타 세력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진 후, 대한민국은 잠시나마 권력의 공백 상태를 맞이했다. 하지만 이 틈을 노리고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조직적이고 치밀한 군사반란이 벌어졌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고 군 지휘권을 장악한 뒤, 서울 시내에 군을 배치하여 쿠데타를 완성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구국의 영웅"이라 포장하며, 박정희의 죽음 이후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 주장했다. 하지만 그 본질은 철저한 권력 탈취였다. 국군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은 하나회를 중심으로 군 내부 세력을 규합하여, 계엄사령부를 장악하고 정치적 반대 세력을 철저히 제거해 나갔다. 이 쿠데타는 한국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다시 군부 독재를 연장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이 시기에 일어난 ‘서울역 회군’은 민주화 운동 내부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서울역에서 시위하던 학생들 중 유시민은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심재철은 "지금은 후퇴해야 한다"며 회군을 주장했다고 전해진다. 결과적으로 시위대는 물러났고, 훗날 심재철은 정치권에 진입하며 보수 정권에 협조적인 길을 걷게 된다. 이는 민주화 운동에서의 선택이 훗날 정치적 입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서울역 회군이 서울역 진군이었다면 서울의 봄은 왔을까?
2. 5.18 광주 민주화운동 – 학살의 서막
1980년 5월 17일, 전두환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며, 정치 활동을 전면 금지시키고 언론을 강력하게 통제했다. 그리고 다음 날, 광주에서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계엄 해제와 민주화를 외쳤지만, 정부는 즉각 공수부대를 투입해 무자비한 진압을 시작했다.
광주는 철저히 외부와 차단되었고, 시민들은 폭도로 몰렸다. 공수부대는 여성과 노인을 가리지 않고 폭력을 행사했으며, 무차별적인 총격과 고문이 자행되었다. 시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시민군을 조직했지만, 결국 군의 막강한 화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전두환 정권은 이후 광주를 "폭동의 도시"로 몰아갔고, 5.18 민주화운동을 "북한이 사주한 반란"이라는 왜곡된 서사로 포장했다. 하지만 이후 국내외 언론을 통해 전두환 정권이 직접 광주 학살을 주도했음이 밝혀졌다. 이로 인해 전두환은 민주화 이후에도 "학살자"로 낙인찍혔고,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을 막았던 최악의 인물 중 하나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3.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 민주화 세력 제거를 위한 공작
광주 학살이 진행되는 동안, 전두환 정권은 또 하나의 치밀한 공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대중을 반역자로 몰아 제거하는 것이었다. 5월 17일 계엄 확대와 동시에, 전두환은 김대중을 포함한 주요 야권 인사들을 체포하고, 5.18 민주화운동을 ‘내란 음모’의 일부로 조작했다.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은 광주 학살의 책임을 민주화 세력에게 뒤집어씌우려는 전략이었다. 김대중은 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미국과 국제사회의 개입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이는 전두환 정권이 국제적 정당성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4. 삼청교육대 – 공포 정치의 극대화
전두환은 국민을 철저히 통제하고 공포 정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1980년 8월 삼청교육대를 설립했다. "사회 정화를 위한 정책"이라는 명분이었지만, 실제로는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국민을 무차별적으로 탄압하는 수단이었다.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사람들은 법적 절차 없이 강제 구금되었고, 잔인한 고문과 가혹 행위를 당했다.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장애를 입었으며, 심지어 단순 노숙자나 가난한 사람들이 ‘불량배’로 낙인찍혀 끌려가는 경우도 많았다. 이는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권력 유지를 위해 국민을 적으로 간주하는 독재 정치의 극단적인 사례였다.
5. 경제 장악과 국제그룹 해체 사건
전두환 정권은 경제 정책에서도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국제그룹 해체 사건이다. 당시 국제그룹은 재계 7위 규모의 대기업으로 성장하고 있었으나, 정권에 협조적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강제 해체되었다.
공식적인 이유는 "재무 구조 악화"였지만, 정권의 뜻에 반하는 기업을 제거하기 위한 표적 탄압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이 사건은 이후 대한민국 기업들이 정권과 유착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경제 구조를 왜곡하는 원인이 되었다.
6. 6월 민주항쟁과 군부의 종말
1987년, 전두환 정권은 극심한 독재와 인권 탄압으로 국민적 저항에 직면했다. 특히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국민들의 분노를 폭발시켰고, 전국적으로 민주화 요구 시위가 확산되었다.
결국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전국에서 일어나면서, 전두환은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국민들의 강력한 요구에 떠밀려 6.29 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한국 민주주의가 군부독재를 극복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전두환은 마지막까지 정권 연장을 시도했고, 1987년 대선에서 KAL 858기 폭파 사건이라는 선거 공작을 통해 보수 결집을 노렸다. 결과적으로 후계자였던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며, 군사 정권은 또다시 연장되었다.
7. 전두환의 최후 – 법과 정의를 우롱한 독재자의 말로
훗날 1995년, 김영삼 정부는 5.18 민주화운동 특별법을 제정하고,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속했다. 법원은 그에게 내란 및 반란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했으나, 1997년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광주 학살에 대해 단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고, "내 전 재산은 29만 원뿐"이라는 말로 국민적 분노를 일으켰다. 전두환이 남긴 것은 민주주의의 상처였고, 역사는 그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가장 큰 걸림돌로 기록하고 있다.
8. 추천 콘텐츠
김성수 감독, 「서울의 봄」 1979년 박정희 사망부터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격변기를 다룬 작품. 군부 쿠데타와 시민의 저항이 교차하는 순간을 사실감 있게 묘사한다.
장훈 감독, 「택시운전사」 독일 기자와 광주 택시운전사의 여정을 통해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을 그린 영화. 검문을 뚫고 광주 현장을 취재하려는 노력이 담긴 실제 사례를 모티브로 한다.
장준환 감독, 「1987」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 시작해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긴박한 과정을 다뤘다. 군사정권의 폭력과 이를 맞서는 시민들의 용기가 생생하게 펼쳐지며, 1987년이라는 격동의 해를 충실하게 재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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