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편파적인 한국현대사 - 나의 대통령 ① 박정희
1. 유신독재의 탄생 – 영구 집권을 위한 폭주
1972년 10월, 박정희가 스스로 마련한 ‘유신헌법’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파격적이고 억압적인 통치 체제를 열었다. 기존의 민주적 장치는 사실상 전면 폐기되었고, 대통령 선출 방식을 ‘국민 직선제’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선제’로 바꿔놓았다. 이로써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지지 세력이 장악한 조직을 통해 ‘손쉽게’ 선출되는 구조를 확보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대통령 임기의 연장과 연임 제한이 사라졌기에, 박정희에게는 사실상 종신 집권의 길이 열렸다.
이 때 가장 논란이 되었던 조치가 바로 긴급조치였다. 긴급조치란 ‘국가 안위에 중대한 사유’가 있다고 대통령이 판단하면, 국회나 사법부의 견제 없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는 권한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긴급조치 1호’에는 유신헌법 자체를 부정하거나 비판하는 모든 행위를 법적으로 금지하고, 이를 위반한 자는 중형에 처하도록 했다. 이처럼 국가 권력이 ‘국익’과 ‘안정’을 명분 삼아 개인의 자유를 가차 없이 억압하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헌법은 권력 집중의 도구로 전락했다. 결국 유신체제 하에서 시민들은 ‘유신헌법’을 지지해본 기억이 없음에도, 정부의 독재적 결정에 일방적으로 따라야 했다.
2. 김대중을 죽이려 한 정권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신민당 후보였던 김대중에게 간신히 승리했다. 득표율 차이가 크지 않았다는 점은 이미 국민 다수의 정권 피로감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시사했다. 무엇보다 김대중이 선거유세를 통해 제시했던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의 조화’라는 메시지는 유신독재에 염증을 느끼던 이들에게 크게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선거가 끝난 뒤,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을 가장 위협적인 대항마로 규정하고 무력이라도 동원해 제거하고자 했다. 그 대표적 사건이 바로 1973년 일본 도쿄에서 일어난 김대중 납치 사건이었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김대중을 호텔에서 납치해 바다에 수장하려 했으나, 일본 정부와 미국 측의 개입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이 전대미문의 사건은 유신체제의 반대자를 억압하는 방식이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행해졌음을 뜻하며, 박정희 정권이 ‘필요하다면 물리력을 통한 제거’까지 주저하지 않았다는 점을 전 세계에 드러냈다.
3. 부마항쟁과 YH사건 – 폭발하는 시민의 분노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현 창원)에서 동시에 발생한 부마항쟁은 박정희 정권의 심장을 강타한 결정적 사건 중 하나였다.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수많은 대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는데, 이는 단순한 지역적 시위가 아니라 전국적 민주화 운동의 신호탄이었다. 경제 발전의 이면에 누적된 양극화와 정치적 탄압, 그리고 긴급조치에 대한 분노가 한꺼번에 분출된 셈이었다.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시내에 투입하여 시위대를 무력 진압했다. 그러나 시민들의 저항 의지는 쉽게 꺾이지 않았고, 이는 박정희 독재가 내부적으로도 한계에 다다랐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부마항쟁에 앞서 벌어진 YH사건(1979년 8월) 또한 박정희 정권의 폭압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YH무역의 여성 노동자들이 폐업 위기로 생존권을 위협받자,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며 노동자들의 실상을 호소했다. 그러나 경찰의 강제 진압 과정에서 사망자가 나오면서 사회적 공분이 폭발했고, 당시 야당 지도부에 대한 탄압도 가중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민주화 요구가 더욱 거세졌고, 부마항쟁으로 이어지는 시민의 분노를 추동했다.
4. 장준하 선생의 죽음
박정희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했던 주요 인사 가운데 장준하 선생은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독립운동가 출신이자, 해방 후 《사상계》를 창간하여 지식인 사회를 선도한 거목이었다. 그러나 유신정권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고 적극적으로 저항하자, 정권의 감시와 탄압이 더욱 거세졌다.
1975년, 장준하 선생은 등산 도중 ‘실족사’를 당했다는 공식 발표가 나왔지만, 이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사고 현장의 정황과 주변 증언을 종합하면 단순 실족으로 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고, ‘정권이 뒤에서 손을 썼다’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 그리고 민주화 운동의 대부였던 장준하 선생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일은, 당대 지식인들 사이에 큰 충격을 주었고 결국 유신 정권에 대한 불신을 한층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5. 김형욱 실종사건
중앙정보부 초대·2대 부장을 역임한 김형욱 또한 박정희 권력의 핵심부에 속했지만, 훗날 격렬한 대립 끝에 미국으로 망명했다. 망명지에서 김형욱은 박정희 정권의 비리와 폭압적 실태를 폭로했으며, 이는 유신 정권에 큰 타격을 주었다. 특히 해외 언론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중앙정보부의 공작 활동과 정치 개입 사례를 구체적으로 밝히면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시선도 곱지 않게 만들었다.
1979년 10월, 김형욱은 프랑스 파리에서 돌연 사라졌고 그 뒤 행방이 묘연한 채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여러 증언과 정황은 중앙정보부가 김형욱을 해외에서 암살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는 정권 수뇌부에 대한 내부 정보와 비밀을 쥔 인물을 제거함으로써, 박정희 체제가 끝까지 권력 누수를 막으려 했다는 의혹을 뒷받침한다.
6. 10.26 사태 – 박정희 최후의 날
1979년 10월 26일 저녁,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는 대한민국 현대사를 뒤흔들 거대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박정희는 최측근들과 만찬을 가지며 부마항쟁 이후 정세 안정을 논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예상치 못한 총성이 울렸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각하, 이제 그만하십시오”(영화에서)라는 말을 남기고 방아쇠를 당겼고, 이 한 발의 총성은 18년간 지속된 박정희 독재 정권을 끝장냈다.
박정희의 사망은 곧바로 대한민국 권력 구조를 흔들었다. 1972년 유신헌법 이후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등을 통해 정치적 자유를 철저히 억압해 왔고, 1979년 부마항쟁은 국민들의 저항이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위기 속에서 박정희는 김재규, 차지철 같은 최측근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결국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균열이 발생하며 정권이 붕괴했다.
김재규는 박정희 정권의 핵심 정보기관장이자 독재 정권의 수족 역할을 해왔던 인물이었다. 중앙정보부를 통해 민주화 세력을 탄압하고 독재를 유지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던 그가 박정희를 직접 암살했다는 것은 단순한 개인적 반역이 아니라, 체제 내부에서도 박정희의 독재가 한계를 맞았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김재규는 체포 직후 "나는 민주주의를 위해 박정희를 제거했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행동을 단순한 권력 투쟁이 아닌 ‘혁명적 행동’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10.26 이후 정국을 장악한 것은 민주주의 세력이 아니라, 전두환과 신군부였다. 신군부는 12.12 군사반란을 통해 군권을 장악한 후 김재규를 반역자로 몰아 신속하게 사형 판결을 내렸다. 김재규는 1980년 5월 24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이후 한국 사회에서 그의 행위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게 되었다.
그를 반역자로 볼 것인가, 아니면 독재 타도를 위한 결단을 내린 혁명가로 볼 것인가. 이 질문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어 왔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 하에서는 그가 단순한 쿠데타 실패자로 취급되었고, 그의 행위는 개인적 야망으로 설명되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그의 행동이 단순한 권력 찬탈이 아니라 독재 종식을 위한 결단이었다는 해석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마침내 2025년, 김재규 사건에 대한 재심이 결정되면서 45년 만에 그의 행위를 다시 평가하는 과정이 시작되었다. 이는 단순한 법적 재판이 아니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김재규의 총성이 민주주의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박정희가 쓰러지자 대한민국은 잠시 권력 공백 상태를 맞았지만, 그 공백을 채운 것은 민주 세력이 아니라 또 다른 군사독재 세력이었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박정희의 죽음을 이용해 권력을 장악했고,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강탈했다. 결국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되찾기까지 약 1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독재자가 사라진다고 해서 곧바로 민주주의가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10.26 사태가 우리에게 남긴 교훈은 독재를 끝내기 위해서는 단순히 독재자를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이었다.
박정희는 죽었지만, 대한민국은 여전히 군부독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김재규가 민주주의를 위해 총을 들었다는 그의 주장이 정당한가에 대한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의 총성이 대한민국을 영원히 바꿔놓았다는 점이다.
7. 박정희의 유산 – 긍정과 부정
박정희 정권은 근대화와 경제성장을 앞세워 ‘한강의 기적’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1960~70년대 대한민국은 짧은 기간에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급속 전환하며 수출 주도형 경제의 틀을 다졌다. 농촌 전기 및 도로 확충, 새마을운동 등은 농어촌 주민들에게 구체적인 생활 향상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 모든 과정은 강력한 독재 통치 속에서 이루어졌다. 긴급조치 아래 인권과 언론의 자유는 심각하게 침해되었고, 반체제 인사들은 구금·고문을 비롯한 각종 탄압에 노출되었다. 박정희가 남긴 유산은 지금도 극단적인 찬사와 비판으로 갈린다. 민주주의를 희생한 채 얻은 경제 발전이 과연 정당했느냐는 질문이 여전히 유효하며, 이는 한국 사회가 독재의 경험을 어떻게 기억하고 평가해야 하는지를 두고 끊임없이 갈등해온 이유이기도 하다.
8. 김영삼의 활약과 정치적 아이러니
박정희 정권에 맞선 주요 야당 정치인 중 하나인 김영삼(YS)은 부산·경남 지역을 기반으로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 그는 YH사건을 계기로 박정희 정권의 탄압에 정면으로 부딪혔고, 민심의 지지를 받아 신민당 총재로 활약했다. 정부의 폭력 진압으로 노동자가 사망하자 김영삼은 정권에 맞서 강력히 항의했고, 이는 곧 정권의 보복으로 이어졌다. 1979년에는 정부가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을 추진하고, 이른바 ‘가택연금’ 상태를 만들어 정치 활동을 막았다.
당시 부산·마산 지역은 반독재 투쟁과 민주화 요구의 중심지였고, 부마항쟁이 바로 이 지역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오늘날을 돌아보면 역사는 참 아이러니하게 돌아간다. 현재 부산, 마산(창원) 지역은 주로 ‘국힘(보수정당)계열’ 후보들을 선택하는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과거 박정희 독재에 맞서 민주화의 불길을 지폈던 지역이, 정작 박정희의 후신 정당 계열에게 표를 몰아주는 상황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이 흐름에는 김영삼의 ‘3당 합당’(1990년)이 큰 분기점이 되었다고 본다. 김영삼은 노태우, 김종필과 함께 손을 잡아 보수정당 정부의 총리와 대통령을 잇달아 배출했는데, 이는 과거 민주화 세력 지지자들에게 ‘배신’으로 비쳐졌다. 이 이야기는 훗날 한국 민주주의가 어떤 선택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지를 살피는 중요한 사건이지만, 그 상세한 과정은 또 다른 장에서 다루는 것이 좋겠다.
9. 당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 추천
- 임상수 감독, <그때 그 사람들>: 10.26 사태에 이르는 긴박한 정치 공작과 당시 권력 내부의 역학을 풍자적이고 비틀린 시선으로 조명했다. 김재규와 박정희를 모델로 한 인물들 사이에 오가는 긴장감이 사건의 비극적 결말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 우민호 감독, <남산의 부장들>: 중앙정보부장 김규평(김재규를 모델로 한 가상 인물)을 중심에 두고 펼쳐지는 권력 암투를 사실감 있게 그려낸다. 특히 10.26 사건 직전까지 정권 내부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흔들림을 집중 조명해, 박정희 시대 말기의 분위기를 생생히 느끼게 해준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박정희 정권은 극적인 경제성장과 함께 혹독한 독재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김대중 납치 사건, 김형욱 실종, 부마항쟁, 그리고 궁정동에서 울려 퍼진 총성까지. 그 시대를 관통한 굵직한 사건들은 하나같이 불가분의 연쇄를 이루며 독재 정권의 태동과 몰락을 보여준다. 동시에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던 김영삼, 김대중 등 야당 인사들의 부침과, 지역 민심이 변화하는 과정은 한국 현대정치의 아이러니를 구체적으로 실감하게 만든다. 이러한 역사를 살펴보는 일은 민주주의가 결코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는다는 점을 일깨우는 동시에, 과거의 경험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성찰하도록 돕는 토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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